제일 추운 봄.

추사 김정희_세한도

by 묘연

3월.

아직 차갑긴 하지만 언 땅이 녹으면서 땅속에 벌레들이 간질간질 거리며 기지개를 켜는 시간이야. 이럴 때 학교에 가면 봄이랍시고 난방을 잘 틀어주지 않아 매우 추워. 그렇지만 학생들은 새로 시작하는 공부와 일들 때문에 바쁘게 걸어 다니지.

봄은 그래.

아직 많이 춥긴 하지만 바쁘게 그리고 많이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두꺼운 패딩 대신 조금 얇은 코트를 입게 되지. 갑자기 3월에 눈이 내리고 기온이 영하까지 떨어지는 꽃샘추위가 와도 그것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많이 움츠려들지 않아. 아직 보이지는 않지만 땅속에서는 많은 생명체들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고 있어.


원래대로라면 너도 어린이집에 새로운 반에 배정받아 새로운 선생님과 새로운 친구들에게 적응하느라고 하루를 정신없이 보내고 있었겠지만 3월이 절반이 지난 지금 아직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은 시작되지 않았어.

어릴 적 자주 보던 공상과학 만화 '원더 키디 2020'의 시대가 열렸는데 우리가 꿈꿔왔던 미래와 다르게 지금 전 세계로 무서운 폐렴 바이러스가 돌아 모두가 문을 걸어 잠그고 집안에 들어앉아 숨죽이고 있어.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는 사람들에게 공포를 심어주고 사람들은 서로의 온기가 독이 될까 서로 악수도 하지 않고 포옹도 하지 않지. 그렇게 앞 동에 사는 친구네 집에도 놀러 가지 못한 지 몇 달이 지났네.

꼭꼭 닫은 창문으로 따듯한 햇살이 이제 좀 나와보라고 부르지만 우린 아주 추운 겨울 어느 날처럼 문을 걸어 잠그고 웅크리고 앉아있어. 신발을 신고 나가본 지가 언제인지, 지금이 겨울인지 봄인지도 모를 계절을 지나고 있어. 마음은 황량하기 짝이 없고 하루 종일 너희와 함께하면서 이 길고 긴 겨울을 버티고 있어.

99A51C3E5BA442DE08.jpeg 김정희 <세한도(歲寒圖)>, 1844년, 종이에 수묵, 23.0x69.2cm

집에 이렇게 있으니 1년 중 가장 추운 겨울날을 그렸다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가 떠올랐어.

추운 겨울 황량한 들판 위에 초라한 집 한 채와 소나무 두 그루, 잣나무 두 그루가 속절없이 서있는 게 왠지 모르게 집과 나무 사이사이에는 뼈가 시릴듯한 차가운 바람이 감돌고 있을 것 같아. 옹기종기 모여있는 게 마치 추워서 그런 것처럼 말이야.

나무에 달린 침엽수들이 더욱더 모질고 차갑게 보이는 건 기분 탓인지 모르겠어.

그래도 위안이 되는 건 혼자가 아니라는 것 때문일 거야. 나무를 두 그루씩 배치해놓고 그 사이에 집을 그린 건 아마 이 그림을 그린 작가가 세상 추운 날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실제로 이 그림을 그린 김정희는 유배지에서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해. 김정희는 이 무렵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게 되지. 친구들도 아내도... 그리고 사회로부터 떨어져 나오지.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고 쫓겨왔는데 사랑하는 가족들과도 헤어져 혼자 살아가야 한다면 얼마나 힘이 들까? 아무리 강철 멘털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런 순간이 오면 정말 세상을 끝장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모르는 일이야. 아마 '이 순간 내가 죽는다 해도 누가 알아줄까?' 하는 마음에 자존감도 바닥을 칠 거라고.

하지만 이때 김정희에게는 손을 내밀어 주는 친구가 있었어. 바로 그의 제자 이상적이라는 사람이야. 그는 모든 부와 권력과 일상을 잃어버린 김정희에게 중요한 책들을 가져다주며 마음을 나눠. 바닥을 뚫고 저 깊은 지하세계로 떨어져 벗어나야 할 곳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힘들 때 누군가가 따듯하게 손을 잡아주고 빛을 비춰준다면 얼마나 고마울까? 그 마음을 소중하고 고맙게 생각한 김정희는 이상적에게 이 그림을 그려서 보내줘. 추운 겨울날 소나무와 잣나무와 집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그림을 말이야.

그리고 이 발문에 이렇게 적지.


공자가 이르기를,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네.

a0017365_4b5a34c1c5334.jpg 세한도 발문


원래대로라면 아빠는 회사에 출근했어야 하고 너는 어린이집에 가있어야 하고 엄마는 아기를 재우고 혼자 있어야 하는 시간이지만 지금 우린 이렇게 함께 하고 있어. 보이지 않아 더 무서운 바이러스. 그것을 피해 우린 지금 집안에 웅크리고 있지. 웅크리고 있느라 밖에 나가 돈을 쓰는 사람은 줄어들고 시장은 어려워지고 덕분에 주식시장은 성난 파도가 치고 주식을 직업으로 하는 아빠는 그 그래프 속에서 난파된 배를 탄 사람처럼 허덕이고 있어. 덕분에 우리가 투자를 하던 회사는 망해버렸고 우리 집도 휘청거렸지. 어떻게 보면 커다란 시련이야.

근데 우리뿐만이 아닐 것 같아. 아무도 오지 않는 추운 가게에서 발만 동동 구르면서 하루를 보내는 사람도 있고 그러지도 못해 가게 문을 닫아야 하는 사람도 있고 소중한 가족을 잃은 사람도 있고 당장에 마스크 한 장 구할 수 없어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사람도 있어. 모두들 닿기를 기피하는 환자들을 위해 24시간을 쉼 없이 일해야 하는 사람도 있고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어. 그렇게 추운 겨울은 우리의 손가락을 얼게 하고 얼어버린 손가락으로 차가운 글씨를 쓰게 해.

그러고 보면 우린 참 다행이지. 세한도에 그려진 나무와 집처럼 우린 함께 하고 있으니 말이야. 쉽게 시들지 않는 소나무와 잣나무만큼 우리가 함께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일인지 아는 것. 그것이 지금 이 겨울을 버틸 온기를 간직하게 해.

우리 언젠가 이렇게 함께 모여 웅크린 시간이 소중한 추억이 될지도 몰라. 겨울보다 추운 봄날 따듯해질 봄을 기다리며 옹기종기 모여서 기다렸던 나날들.

이 시간들을 너무 힘들게만 생각하지 않는다면 가진 것을 조금 잃어도 서로의 마음에 온기를 충전하는 시간으로 긍정적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러다 보면 어느새 추위는 저만치 가있고 따듯한 봄이 올 거야.

꽃잎과 함께 달큼한 바람이 불어오면 얼었던 손가락을 펴고 서로 악수를 하고 포옹을 하자. 그리고 사랑한다고 서슴없이 표현하고 웅크리며 간직했던 온기를 나누자. 그리고 우리 지금을 곱씹으면서 바이러스 덕분에 가족들과 함께 징그럽게 붙어 있었다고 얘기하면서 웃자꾸나.

아무래도 이 추운 봄날이 더 이상 춥지 않게 느껴지는 건 서로 웅크리고 앉아 나누는 따듯한 온기 덕분인 것 같아. 괜찮냐고 묻는 안부에 따듯한 입김이 서려있기 때문이고 서로 보내는 문자 속에 작고 하얀 나비가 춤을 추기 때문이겠지.

세한도처럼 추운 겨울이 오고 나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쉽게 시들지 않는다는 걸...

잊지 말자꾸나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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