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연속, 길랑-바레 증후군 병원 생활기
배를 바닥에 대고 손을 턱 아래에 모은 뒤 상체를 들어 올리기 위해 있는 힘을 쓰는 아이. 기를 쓰며 터미타임을 하는 아이를 보며 엄마의 재활 치료 모습이 떠올랐다. 누워만 있던 아이가 스스로 뒤집기를 한다. 상체를 들어 몸을 뒤집고, 그러다가 자리에 앉아 손으로 장난감을 만지며 논다. 소파를 잡고 한 발 한 발 걸어보던 모습이 얼마 전인데 손을 놓고 걸으며 의기양양 표정을 짓는다. 뒤집기를 연습하던 아이의 몸짓은 마치 갇힌 몸에서 조금씩 자유를 되찾아가는 엄마의 투쟁과도 닮았다. 엄마는 작년 ‘길랑-바레 증후군’을 진단 받고 팔과 다리를 쓰지 못했다. 건강했던 엄마는 하루아침에 대소변도 혼자 가릴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나흘간의 중환자실 입원 후, 일반병동으로 가려면 간병인을 구해야 한다. 간호사에게 간병인 업체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건네받고 전화를 걸었다. 엄마의 상태를 설명할수록 나는 자꾸만 죄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혼자 거동은 전혀 못 하시고, 식사도 혼자 하실 수 없습니다. 대소변도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한참 망설이다가 나는 억지로라도 덧붙였다.
“그래도 체구가 작으신 편이에요. 또 저와 동생이 매일 와서 몇 시간은 함께 간병할 겁니다. 그 시간은 쉬고 계셔도 돼요”
엄마의 무거운 현실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포장하고 싶었지만, 감출 수 없는 현실에 떨림이 묻어났다.
다음 날, 첫 번째 간병인이 도착했다. 마른 체구에 허리가 굽은 노모 같은 분이었다. 작은 여행가방에 담긴 짐을 풀고 침대 곁에 자리를 잡았지만, 첫날밤부터 엄마를 두세 시간마다 일으켜 체위를 바꾸느라 숨을 헐떡였다.
“이러다간 제 허리가 먼저 나가겠네요.”
그 말에 나와 동생은 미안함에 고개를 숙였다. 이틀 만에 그만둔 뒤, 또 다른 간병인이 왔다. 이번에는 엄마보다 열 살은 젊어 보였지만, 사흘째 되던 날 밤 결국
“죄송합니다, 도저히 감당이 안 됩니다” 하고 떠났다. 간병인들이 남긴 빈자리에는 침대에 눌린 엄마의 몸 냄새와, 우리 가족의 막막한 한숨만 가득 남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몇 주가 흐르고 여러 번의 간병인이 들어왔다 나가는 일이 지속되었다. 그즈음 엄마도 스스로 손을 들어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 간병인은 꽤 몇 주간 엄마를 맡아 주셨다. 시간이 흐르며 애석한 마음들이 결국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음이 느껴졌다.
6주간의 대학병원 입원 후 재활병원으로 전원 하여 아침, 밤, 낮 가리지 않고 재활 치료를 받던 엄마. 더운 여름 땀을 뻘뻘 흘리고도 간호보조사 선생님의 도움이 없으면 씻지도 못해 수건에 물을 묻혀 몸을 겨우 닦고 땀을 에어컨 아래에서 말리며 더위를 보냈다. 엄마에게 왜 이렇게 운동을 열심히 하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너네들에게 부담 주지 않으려고”
엄마가 운동을 하는 이유에는 나와 동생 결국 자식이 앞에 있었다. 자식에게 행여라도 짐이 될까 엄마는 자신의 안위가 자식에게 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이었다. 병실에 있어도 엄마는 자식을 생각했다. 엄마와 나의 아들, 둘 다 결국 해내는 공통점이 있다.
삶의 위기가 여러 번 있을 때마다 엄마는 펜을 들어 노트에 ‘지나간다’를 적으며 시기를 버텼다고 말했다. ‘지나간다’라는 단어는 엄마가 삶의 바닥에서 건져 올린 부적 같은 것이었다. 참 엄마다운 발상이다. 글로 쓰면 이뤄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니. 어쩌면 천부적인 긍정의 힘이 자꾸 어려운 일을 주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견딜 수 있을 만큼 고통도 주어진다고 했던가. 엄마는 견디는 것을 해냈고 그래서인지 자꾸 전보다 더한 고통이 생기는 건 아닐까 마음이 허전해진다. 젊고 예뻤던 엄마는 손자가 있고 할머니가 됐다. 엄마의 사랑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때 나도 엄마가 되었다. 아이가 커갈수록 엄마가 늙어간다는 사실이 마음에 사무친다. 누운 아이로 태어나 누워서 가는 게 인생일까. 슬픔이 깊을수록 나는 엄마를 더 사랑해야 한다. 아이가 자라며 엄마가 늙어가듯, 시간의 흐름은 막을 수 없지만, 사랑만큼은 내가 더할 수 있으리라 믿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