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엄마, 아이 모두 병원에 있던 시간들
아이가 태어나기엔 아직 이른 여름이었다. 임신중독증이 악화된 나는 고위험 산모로 분류되어, 결국 환자가 되었다. 며칠이면 끝날 것 같던 입원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입원이 길어지던 어느 날, 나는 몸 상태가 급하게 나빠졌고, 침대 머리 위쪽에 붙어 있는 전화기를 들어 간호사실에 전화를 걸다가 기절 했다. 간호사실에 있던 선생님은 벨 소리가 들려 병실로 향했고 기절한 나를 발견했다. 나는 밤새 아이가 잘 있는지 태동 검사를 했다. 나의 상태를 살핀 담당 주치의는 급하게 분만 일정을 잡았다. 예정에도 없던 어느 오전, 나는 남편과 엄마에게 각각 전화를 걸어 수술실로 들어간다는 짧은 말을 전한 뒤, 혼자 수술실로 향했다.
33주 0일.
예정일보다 7주나 이르게 태어난 아이는 수술실에서 짧은 눈인사 후 곧장 신생아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보호자가 없이 수술실로 향했단 나의 마음을 아는 듯, 의료진은 최선을 다해 나의 걱정의 열매가 커지지 않도록 진심을 다해 나를 위로했다. 내 손을 잡아 준 간호사님 덕분에, 나는 두려움 대신 곧이어 만날 아이에 대한 설렘을 마음에 품었다.
태어나자마자 아이는 의료진의 손에 맡겨졌다. 선생님들은 능숙한 손길로 작디작은 아이의 손등에 주삿바늘을 꽂아 링거를 달았고, 코에는 산소 튜브를, 입안에는 영양을 공급 할 호스를 연결했다. 손바닥만 한 가슴엔 심장 박동과 호흡을 확인할 기계를 부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2kg도 채 되지 않는 작은 몸.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엄마 품이 아닌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세상과의 만남을 시작했다.
혼자 출산을 하러 들어간 나를 가장 걱정한 이는 내 엄마였다. '길랑-바레 증후군'으로 재활병원에 입원 중이던 엄마는, 딸의 갑작스러운 출산 소식에 놀랐고 달려올 수 없어 마음을 졸였다. 아직 몸의 마비가 채 낫지 않아 혼자 걷기조차 어려웠던 엄마는 수술실로 향하는 딸의 소식을 듣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도 했다. 그렇게 나도, 엄마도, 우리 아이도 같은 서울 아래 각자의 병실에서 서로를 향한 마음에 애끓는 날들을 보냈다.
결혼 후 수년간 기다렸던 아이. 엄마에게는 첫 손자이자, 생에 처음 주어진 '할머니'라는 이름이었다. 새 생명이 가족이 된 우리의 여름은, 상상했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나는 임신중독증으로 병원에, 아이는 중환자실에, 엄마는 길랑바레 증후군으로 재활병원에... 순간, 세상의 모든 비극이 우리 가족에게 몰려온 듯한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내야만 했다. 나는 작게 태어났지만 살고자 하는 아이를 향해 경이로움을 느끼기로 했고, 엄마는 잠을 줄여가면서도 재활 치료에 온 힘을 다했다.
“엄마 앞으로 우리 셋이서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자"
우리는 각자 병원에 있으면서도 '함께' 할 미래를 꿈꾸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