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를 잇는 사랑

엄마를 보며 나의 할아버지를 떠올리던 날

by 윤미진

"서준아 어엄마아! 어엄마아! 해봐 “

열 달이 지났지만 아직 "엄마"라고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 아들을 걱정하는 딸의 마음을 읽은 걸까. 엄마는 입을 과장되게 크게 벌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이 앞에 앉는다. 손자와 눈을 맞추며 ”엄마 해봐. 어엄마아, 어엄마아“라고 말하는 엄마. 엄마는 손자 앞에서 말 트이기 선생님으로 변신한다. 나는 문득 ‘할머니에게 받는 사랑이 얼마나 크고 따뜻한 지, 아들도 느끼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와 엄마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며, 나는 종종 나에게 큰 사랑을 보내 준 할아버지를 떠올린다. 시골에서 농사일을 하던 노인들이 대개 그렇듯 할아버지는 아침잠이 없었다. 해가 뜨기 전 일어나, 담배 한 대를 물고 라디오에 주파수를 맞췄다. 아들도, 며느리도, 손녀도, 손자도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캄캄한 새벽녘, 할아버지에게 말을 건네는 것은 오로지 라디오뿐이었을 것이다. 고요와 적막을 이기고자 틀어놓았던 라디오. 할아버지는 그렇게 하루를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자식들을 위해서 해가 뜨면 흙을 일구고, 해가 지면 일을 마쳤다. 땅을 파고 흙을 메우고 곡식을 심는 농사일을 60년이 넘도록 이어졌다. 그 시대의 사람들이 그렇듯 십 대부터 지게를 지고 논과 밭으로 향하는 게 더 익숙했던 삶. 긴 시간 할아버지는 농사를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일을 하고 다음날 동이 트기 전 일어나 또 일을 했다.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할아버지는 농부였다. 할아버지는 농사를 시대적 소명인 것처럼 행했다. 그럴 때마다 ”좀 쉬엄쉬엄해 “라고 잔소리를 하는 손녀였다.


봄이 오면 도랑 근처에 얼음이 녹아 물이 흐른다. 할아버지의 일 년 농사 시작이다. 할아버지는 묘판을 설치하고 벼 종자를 뿌린다. 모가 자라면 물 찬 논에 허벅지까지 오는 긴 장화를 신고 들어가 일렬로 모를 심고 또 심는다. 할아버지의 노력은 겨울에만 잠시 문을 닫을 뿐, 계절은 돌고 돌아도 할아버지는 농부의 삶을 이어간다. 장맛비가 내리면 작물이 쓰러지지 않을까ᆞ 노심조차했고, 그런 날이 며칠간 지속되면 할아버지는 막걸리나 소주를 김치 한 접시로 접저녁을 대신했다.

”할아버지 왜 이렇게 술을 자주 드세요? “ 라며 몇 번 타박했던 날이 있다. 시간이 지나서야 알았다. 할아버지에게 술잔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야말로, 일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온전히 쉬는 유일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평생 일만 하고 가족을 위한 삶을 살았던 할아버지는 술잔을 같이 기울일 친구도 없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술친구가 되어주지 못했던 지난날들을 생각하면 어리석음의 회한의 마음으로 속이 일렁인다.

나는 행과 불행이 부지불식간에 다가온다는 사실에 절망하며 무력함에 좌절하는 날들을 보내곤 했다. 인간관계에 괴로워하거나, 남편과 말다툼으로 하루를 좌절로 보내곤 한다. 할아버지의 지난한 삶을 돌아본다. 괴로워할 틈도 없이 할아버지는 농사일을 하고 자식들의 입을 채우는데 애싸ᅠ갔다. 본인을 위한 소비라고는 고작 장화 몇 켤레, 막걸리 몇 병, 맥콜 몇 캔을 사드시는 게 유일한 낙이었던 사람. 그러나 자식들과 손녀, 손자에게는 평생 입에 들어갈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게 하는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매 순간 모든 방향 중에 선한 궤도를 따라 살아온 분이다.


나는 아들에게 말을 가르쳐주고 아이가 찾을 때 품을 내어주는 엄마를 보면, 문득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할머니의 얼굴을 보며 세상을 다 가진 듯 부족함 없이 웃는 아들을. 나는 예전에 할아버지에게 받은 사랑을 온전히 헤아리지 못했던 어리석은 자신이 생각난다. 그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저릿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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