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것은 맛있다
온 세상의 술을 사랑한다. 하지만 있는 대로 다 마시는 건 아니다. 희석식 소주는 분위기 따라 일 년에 두어 번, 카스 같은 국산 맥주는 일 년에 열 번, 위스키와 칵테일, 전통주, 브랜디, 와인, 중국 술 까지… 가리지 않고 참 술을 좋아한다. 내가 봐도 나는 술을 참 맛있게 잘도 마신다. 세상사는 낙이 딱히 없는 사람이라 술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이상하게 술을 마시면 다음 날 쓰린 위장에 격렬하게 매운 것이 먹고 싶어진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수많은 술꾼 유전자에 '해장은 매운 걸로'라고 각인된 게 아닐까.
칼칼하고 빨간 국물이 땡긴다. 이럴 때 문배동 육칼집은 ‘가장 완벽한 해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파 듬뿍 들어간 국물에 새빨간 기름이 떠 있다. 보기만 해도 위가 꿈틀거린다. 어젯밤 알코올로 적셔진 내 위의 개비스콘 같은 존재랄까(물론 의학적으론 절대 아니겠지만).
토요일 아침, 숙취에 찌든 부스스한 얼굴을 하고 집 밖을 나선다. 늦게 나가면 줄을 서야 한다. 꼭 개점 시간 맞춰 움직여야 한다. 아,걷기 정말 싫다. 이 날씨에 줄을 서면 숙취고 뭐고 기절해버릴지도 모른다. 어서 가야지.
허름한 건물 1층에 새롭게 단 간판만 이질적이다. 위치상으로 볼 때 ‘이런 곳에서 장사가 되나?’라는 생각이 들 만큼 입지가 좋지 않다.심지어 옆에서는 엘리베이터 설치를 위한 공사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곳에서 아침, 점심, 저녁을 해결한다. 조금만 늦어도 대여섯 명씩 줄이 생긴다. 대개 아저씨들이 많다. 여의도랑 삼성동, 마포에도 분점이 있고, 오래된 집이지만(가족 분들이 나눠 하신다고) 정작 다른 지점은 갈 일이 없었다. 포장도 가능한지라 들고 가는 사람들도 많다.
들어서서 혼자 앉아 주문을 한다. 혼자 와서 북적대는 식당에 그냥 앉을 수 있나. 혼자 오신 아주머니와 합석을 했다.
“육개장 하나 주세요”
꼭 육개장이라고 해야 한다. 육칼이라는 말 자체가 ‘육개장+칼국수’의 줄인 말이지만, 육개장을 주문해야 맛보는 면에 밥이 따라온다.이곳에서 육칼을 주문하면 밥이 안 나온다. 데쳐져 나온 칼국수 면을 빨간 육개장에 담근다. 뜨거운 츠케멘 같은 느낌이랄까.
후추를 총총 뿌리고 후욱후욱. 후룹후룹. 고독한 미식가에 나오는 고로 씨가 이런 느낌일까. 후룩후룩 마신다. 면 한 입에 배추김치 한 입, 다시 면 한 입에 깍두기 한 입…
면이 사라졌다. 그리고 공깃밥을 흔들어 육개장에 과감히 말아낸다. 국물을 대접 채로 들고 마신다. 국물은 새빨갛지만 맛은 의외로 마일드하다. 부드러운 고기 국물과 대파의 단맛이 느껴진다. 짭짤하고 얼큰한데 부드럽다니. 웃긴 말이지만 더 이상 나은 표현을 못 찾겠다.
이제 통통하게 밥알이 분 육개장을 해치울 시간이다.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깍두기를 다시 셀프 리필한다. 우적우적. 우적우적. 후후,우적우적. 반복한다. 토요일 아침, 모르는 아주머니와 마주앉아 육개장을 먹는다.
“아가씨는 뭐 하는 사람이야?”
아주머니가 묻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용산구 일대에 사는 미군 가족들에게 집을 렌트해주시는 일을 한단다. 딸이 꼭 내 또래라며 딸도 친구가 되면 좋을 것 같다고 하신다. 짧은 시간동안 이민을 다녀오고 딸을 키워내신 이야기를 쭉 들었다.
다들 들어보면 평범한 삶은 없는 것 같다. 평범한 얼굴을 하고 길을 걷고 밥을 먹지만 그 안에는 각자 드라마 한 편씩이 들어 있다. 얘길 듣다 전화번호를 받았다. 부모님 연령대의 어른이 ‘친구가 되자’며 연락처를 주셨다. 기분이 묘하다.
물 몇 잔과 깍두기 두 접시로 육개장 풀코스를 마무리했다. 으어~ 하는 목 깊은 곳에서 나오는 감탄사도 절로 나온다. 얼큰하다. 얼큰한데 뱃속이 따끈해진다. 육개장 국물이 쓰린 속을 살살 어루만진다.
역시 술 마신 다음날의 개비스콘이다.
오래된 집들은 맛있다.
1년 이내 문을 닫는 음식점이 50%고 5년 이상 살아남는 음식점은 30%라고 하는 시대다. 요식업계는 이렇게 경쟁이 치열하다. 그럼 이 수많은 음식점들 사이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뭘까.
식품업계에 몸담은 이들을 만나 이 질문을 던지면 한결같이 가장 먼저 말하는 핵심은 '맛'이다. 오랜 시간 동안 고객들에게 사랑받는 음식점들은 뭐가 있을까. 이 글은 이런 궁금증에서 출발한다.
글을 시작하기 전에 ‘오래된’이라는 말의 정의를 고민했다.
사전적 정의로 ‘오래되다’의 뜻은 아래와 같다.
[형] 오래-되다 ‘시간이 지나간 동안이 길다.’
한국에서 음식점이 15년 이상 되면 한 지역(동네)에서 터줏대감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더 오랜 시간 동안 운영된 가게들이 많긴 하지만, 일단 15년 이상 맛을 지켜온 가게들을 기준으로 삼는다. 맛과 서비스에 대한 평가는 각기 다를 수 있으나, 글의 성격상 최대한 경험에 의거해 작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