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다. 나름의 이유로.
대학도 글을 써서, 논술전형으로 들어갔다. 과제 중에서는 발표를 가장 싫어했고 리포트나 소논문 쓰기를 가장 좋아했다. 세 장, 다섯 장 정도야 뭐. 하고 싶은 말들을 쓰다 보면 금방 쪽수를 채우곤 했다. 남들 앞에서 말하는 건 경험도 적고 주목받는 게 익숙하지 않아 힘들었지만, 글을 쓰는 건 익숙하고 아무 눈치 보지 않으며 혼자 할 수 있는 편한 일이었다.
내 생일보다 친구들 생일을 좋아했다. 생일을 핑계로 손 편지를 여러 장 선물할 수 있었다. 평소에 다 하지 못했던 말을 적다 보면 한 장은 거뜬히 넘기곤 했다. 한 번은 편지를 읽고 감동받은 친구의 표정을 봤는데, 편지를 쓸 때의 내 감정이 그대로 전달된 것 같았다. 그럴 때면 몸에 찌릿, 전율이 일었다.
리포트나 소논문 같은, 써야 하는 글이나 특정한 날에 쓰는 편지 말고도 자주 내 생각을 글로 적는다. 보통 무언가에 크게 감명받았을 때, 갑자기 생각이 번뜩 떠오를 때, 강렬한 감정을 오래 남기고 싶을 때 글을 쓴다.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고, 오래 남기고 싶어 글을 쓴다. 그래. 글은 평생 남는다. 덕분에 유치원생이었을 때, 초등학생이었을 때 어떤 생각을 했으며 어떤 일을 겪었는지, 그때 적었던 일기로 다시 느낄 수 있다. 시간이 오래 지나고 나서 초등학생 때의 일기를 보고 있자면, 꼭 초등학생인 나와 대화를 하는 기분이 든다.
‘그래. 네가 그때 그런 생각을 했구나. 지금이랑은 전혀 다르네.’
‘와. 어떻게 이런 생각과 표현을 썼지? 대단하다… 지금이라면 이렇게 쓰고 싶어도 못 쓸 거야.’
지금 써 내린 이 글들도 내년 이맘때쯤 읽으면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비슷한 대화를 하게 될까? 아직 알 수 없는 그 미래의 어느 순간들을 위해 오늘도 글을 쓰나 보다.
내게 글은 원할 때 쓰고, 원하지 않을 때 쓰지 않는 그런 게 아니다. 정말 간절히 글을 쓰길 원해도,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하는 그런 날의 연속이다. 그런 날은 ‘글의 섭리’에 따라 글 쓰기를 멈추고 글이 먼저 다가올 때까지 한 발 물러서 있는다. 하지만 글이 먼저 다가와 주는 날은 이미 다들 알고 있듯이, 그리 많지 않다. 너무 행복해서 빈 종이 또는 컴퓨터 메모장에라도 그걸 자랑하고 싶은 그런 순간이나, 너무 화가 나서 컴퓨터 화면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자판을 부실 듯이 글을 적어야만 속이 시원한 그런 순간. 또 너무 슬퍼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그 눈물을 닦아줄 사람이 자신 밖에는 없어서 눈물 젖은 종이에 글을 쓰는 그런 순간은 생각보다 자주 없다.
그래서 언제나 그런 순간을 기다리면서도, 그 닿을 수 없는 순간에 의존하지 않기 위해 빈 종이에 일단 아무 단어나 적어본다. 일단 아무 단어라도 적고 나면 그다음 단어가 생각나고, 그렇게 단어들이 연결되다 보면 어느새 한 문장, 한 문단, 글 한 편으로 이어진다. 글자는 큰 힘을 가지고 있어서 우선 아무 글자라도 쓰고 나면 그 글자와 관련된 생각들을 끌어당긴다. 아무리 오래전에 했던 생각이라도 결국은 찾아내서 내 앞에 가져다준다. 아주 운이 나쁠 경우엔 처음 시작한 그 한 단어로 그만 끝이 난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쓰지 못한 것에 비하면 큰 성과이고 이다음에는 그 단어를 뺀 어떤 단어라도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럼 다시 또 시작이다. 처음엔 아무 의미 없이 쓴 글자라고 해도 쓰고 난 다음에는 어떤 의미라도 생길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생긴 의미 중에 가장 멋진 의미를 골라내고, 갈고닦아 내는 작업을 하면 된다. 물론 그게 가장 어렵긴 하지만.
사실 글을 쓰고 싶어서 쓴 다기 보다, 글을 쓸 수밖에 없어서 글을 쓴다. 생각, 감정, 느낌, 기분을 표현하고 정리하려면 글을 쓸 수밖에 없다. 그렇게 따지면 ‘글’ 자체를 좋아하기보다 '나'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글을 선택한 것일까? 나는 생각이 넘치고 넘쳐서 그걸 주체할 수 없는 사람이고, 글은 그런 생각들을 정리하고 머리에서 덜어낼 수 있게 도와준다.
지금 이 글처럼.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노래했다. 꽤나 들어봤던 스토리다. 음치이셨던 어머니는 항상 노래에 콤플렉스가 있으셨고, 딸은 그러지 않길 바라면서 유치원 때부터 음악학원에 보내셨다. 덕분에 여러 악기를 다뤄봤다. 피아노, 플루트, 오카리나, 하모니카 그리고 성악까지.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아직까지 곁에 남아 있는 건 목소리이다.
나는 지금도 노래한다. 그런데 스트레스를 풀려고 부르는 노래와는 다르다. 어떤 격을 논하자는 게 아니다. 이를테면 다른 종류의 노래인 것이다. 오히려 노래하면서 스트레스받을 때가 더 많다. 더 잘 부르고 싶은 마음, 더 잘 표현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알바로 번 돈을 비싼 보컬 트레이닝 학원 기타 학원에 몽땅 써보고, 밴드도 들어가 보고, 버스킹 동아리에 가입해 여기저기서 작은 공연도 해봤다. 지금은 친구와 함께 노래 커버 영상을 찍어서 업로드하고 있다. 이렇게 지금까지도 시간, 돈, 에너지를 들여 계속 노래를 하는 이유는 뭘까? 스스로도 궁금했던 질문이다.
노래를 부를 때면 그럴 때가 있다.
주변 모든 것이 사라진다. 검은 허공에 멜로디, 가사, 리듬, 감정 그리고 나뿐이다. 눈을 감고 노래 부르는 것에 집중하면 내뱉는 가사, 멜로디 그리고 호흡에까지 전부 내가 묻어 있다. 걱정이나 고민들도 사라지고, 그 노래 속의 화자가 된다. 마치 배우가 자신이 맡은 역할을 연기하듯 노래 속 인물을 연기한다. 그리고 그 인물은 언젠가 내가 겪었던 상황과 감정을 느끼고 있다. 결국 노래를 부르는 건 언젠가 겪어본, 혹은 지금 겪고 있는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다. 그렇게 노래로 이야기, 감정을 하나하나 표출하면 일종의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너무 슬플 때는 일부러 슬픈 노래를 계속 반복해서 들은 다음 마치 그 노래에 나오는 주인공이 된 듯, 최대한 감정을 실어서 불러본다. 감정을 더 잘 표현하고 싶어서 이렇게도 불러보고 저렇게도 불러보고, 녹음해서 들어본 뒤 다듬고 또 다듬는다. 그렇게 한바탕 노래를 부르고 나면 한편으론 홀가분하고, 한편으론 더 잘 부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몇 시간이 훌쩍 지나버린다.
식당에서 음식이 나오면 가장 먼저 카메라를 가져가고, 길을 지나다니다 자주 멈춰서 카메라를 켜고, 마음에 드는 사진이 나올 때까지 자세를 이리저리 바꿔가며 셔터를 누르는 사람. 같이 밥 먹던 친구, 같이 길을 걷던 친구, 셔터 소리가 멈출 때까지 기다려주던 친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결국 마음에 드는 사진을 건져 내고야 만다. 덕분에 휴대폰 사진첩은 항상 사진으로 넘쳐나고, 컴퓨터에 옮겨 놓는 것으로 모자라 얼마 전에 외장하드를 따로 구입했다. 누군가는 왜 그렇게까지 사진을 찍느냐고 묻기도 한다. 뭐 하려고 그리 열정적으로 사진을 찍느냐고. 눈으로 보는 게 최고라는 사람도 있다.
물론 사진기는 눈보다 못하다. 눈으로 보이는 그 아름다운 광경을 사진기는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 하지만 눈으로 보이는 걸 사진에 그대로 담기 위해서만 사진을 찍는 게 아니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눈으로 보던 풍경에 사진기를 가져다 대는 순간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온전히 나타낼 수 있는 하나의 프레임이 생긴다. 네모 프레임 안에 어떤 것은 넣고 어떤 것은 뺄지 전적으로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사람이 정한다. 무엇을 넣고 무엇을 빼느냐에 따라 같은 풍경, 같은 사람, 같은 음식을 찍었어도 전혀 다른 사진이 탄생한다. 구도를 위에서 아래로 찍었는지, 옆으로 비스듬히 찍었는지, 일부러 삐딱하게 찍었는지 등에 따라 사진이 주는 느낌이 달라진다. 게다가 밝게 찍을지 어둡게 찍을 지도 고민해야 하고, 어디에 포커스를 맞춰서 찍을 지도 결정해야 한다. 이런 것들을 연구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느낌을 살리기 위해 여러 조건들을 결정하는 게 좋다. 사진에는 아무리 담지 않으려고 해도, 그 사람이 가진 특유의 느낌과 시각, 그리고 의도가 담길 수밖에 없다.
좋은 이유가 딱히 없다는 뜻이라기 보단 어떤 조건이 충족될 때만 너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언제나 너라는 이유만으로 좋아한다는 뜻 아닐까? 나도 글, 노래, 사진을 그냥 좋아한다. 셋 다 나를 표현하는 수단이며 무언가를 창작해 내는 과정이다. 그것들이 가진 표현 방식과 특성이 좋다. 그런데 가끔은 자기만족에서 더 나아가 남에게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든다. 남에게 나라는 사람이 누군지 알리고 싶고, 내가 가진 생각과 감정을 공유하고 싶은 욕구.
이때 ‘남’에게 무게가 쏠리면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머리가 멍해지고 그렇게 좋아하던 일들이 한순간에 부담스러워진다. 마음속에 ‘남’이 커지는 순간 남들이 내 표현을 어떻게 생각할까, 어떤 반응을 할까에 초점이 맞춰지고 그러다 보면 좋은 반응을 얻고 싶다, 잘 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순식간에 밀려 들어온다. 남에게 싫은 소리를 듣고 욕먹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테니까. 남에게 보이는 글을 쓸 때, 사람들 앞에서 버스킹 공연을 할 때, SNS에 사진을 올릴 때 이런 경험을 자주 한다. 특히 완벽주의 성향과 맞물리면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실수하면 안 된다’는 강박이 슬그머니 찾아온다. 정말 좋아하던 일들이 갑자기 나를 괴롭히는 일들로 느껴지고 만다.
"이제 연습도 끝인 건가?"
버스킹 공연을 할 때였다. 막상 공연 날에 무대를 마치고 나자, 기쁘기보다 허무했다. 같이 공연했던 친구도 똑같이 말했다. 남들 앞에서 공연할 때보다 그전에 함께 연습하고 준비할 때 더 행복했다. 잠시 처음으로 되돌아가 보면 나는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글을 쓰고 노래를 부르고 사진을 찍었다. 남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는 것은 그다음 일이었다. 물론 그런 것들이 어느 정도 나를 자극시켜줄 수는 있지만, 나를 표현하고 나를 좀 더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이어서 좋았던 것이지, 남들이 칭찬해주거나 잘했을 때만 글쓰기를 좋아한 게 아니었다. 글을 쓰고 있는 순간, 노래를 부르고 있는 순간, 사진을 찍고 있는 순간에 이미 즐거움을 느낀다. 내 글을 보고, 내 노래를 듣고 누군가 감명과 영감을 받는다면 좋겠지만, 아니라고 너무 슬퍼할 필요도, 부담을 가질 필요도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