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킬이 하이드를 마주할 때
어렸을 때는 지킬 앤 하이드를 읽고 그저 흥미로운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완벽하게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게 과학적으로 진짜 가능한가 궁금했고 하이드처럼 악하기만 사람이 실제로 있나 싶기도 했다. 사실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최근 들어 문득 다시 그 얘기가 떠올랐다. 지금 보니 좀 다르게 느껴진다. 지킬 박사이면서 동시에 하이드였던 주인공에 대해 갑자기 궁금해졌다.
왠지 ‘인간의 두 얼굴’ 또는 ‘인간의 양면성’의 대명사로도 쓰이는 지킬 앤 하이드가 그리 멀지 않게 느껴졌다.
혼자 있는 게 좋지만 동시에 혼자 있는 게 외롭다. 겁이 많아 새로운 시도를 못하면서도 어쩔 때는 남들이 놀랄 만큼 용기 있게 도전하기도 한다. 불안하고 걱정이 많은 날이 있다가도 생각 없이 매사에 긍정적인 날도 있다.
‘나는 왜 이렇게 모순적이지? 뭐가 진짜 내 모습이야?’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데다가 능력 있고 새로운 도전에도 머뭇대지 않는 그런 사람이고 싶은데,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고 화도 잘 내지 않고 남에게 폭력적이지 않은 그런 좋은 사람이고 싶은데 그것 또한 쉽지 않았다. 자신 안의 하이드를 잠재우고 싶었던 지킬 박사가 결국 실패한 것처럼,
어쩌면 모두 당연한 일이었을까?
사람들은 누구나 숨기고 싶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 남들에게 자신의 “나쁜 점”을 숨기고 싶어 하며 심지어는 스스로 부정하기까지 한다. 다시 생각해보니 지킬 앤 하이드는 그런 인간 내면의 복잡한 상태를 극단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작품 속 하이드처럼 범죄를 일삼는 완전한 악마 같은 모습은 아닐지 몰라도, 사람들은 누구나 저마다의 하이드를 품고 산다. 지킬 앤 하이드를 들었을 때 바로 떠오르는 영어 단어 Hide(하이드)가 ‘숨기다, 감추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그래서 인상 깊다.
내가 숨기고 싶은 하이드는 뭘까?
쉽게 불안하고 걱정이 너무 많다. 욕심 많고 완벽을 추구하지만 동시에 일을 잘 미룰 때가 많다. 겁이 많아서 새롭게 뭔가 시작하는데 시간이 꽤 오래 걸린다. 또 예민하고 불만이 많다.
항상 느끼지만 장단점을 적는 칸을 채울 때 단점이 장점보다 먼저 떠오르고, 심지어 그 개수도 더 많은 것 같다. 숨기고 싶은 단점을 떠올리자니, 끝도 없이 만들어 낼 수 있을 듯하다. 나는 이것들을 왜 숨기고 싶어 할까? 아마도 이런 모습을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런 모습을 스스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나 보다.
나는 내 안의 ‘하이드’를 그럭저럭 잘 숨겨왔었다. 아니 잘 숨겨왔다고 믿었다. 그런 모습은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저 안 보이게 묻어뒀다. 마치 지킬 박사가 그랬던 것처럼 내가 생각하는 “진짜” 내 모습과 “하이드”를 따로 분리시킬 수 있고 얼마든지 감출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숨긴다고, 없는 취급 한다고 진짜 없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꽁꽁 숨겨둘수록 오히려 힘들어졌다.
애초에 숨길 수 없는 것들이었다. 어쩌면 숨길 필요가 없던 것들이었다. 내 안의 하이드도 결국엔 나였다. 그걸 알아채고 받아들이 데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자신을 색으로 표현한다면 무슨 색이라고 생각하세요?’
정말 어려운 질문이다. 하나의 색을 고르기 어려워서 결국 그냥 좋아하는 색을 고르곤 했다. 나는 가끔씩 빨간색이었다가 어쩔 때는 밝은 노란색이었고 또 다른 때는 어두운 남색이었다. 그 수많은 모습 중에 딱 하나만 꼬집어 ‘나’라고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누가 보면 정말 쉬운 질문이었겠지만, 내게는 정말 어려운 질문이었다. 게다가 주어진 객관식 보기에는 열 개 남짓한 색깔들이 적혀 있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나를 표현하는 색을 정하는 데 정말 그 정도만 고려하면 충분한 걸까?
그랑 블루, 나이트 그린, 인디언 레드, 콜드 그레이 …
세상에는 내가 알지도 못하는 색 이름이 많다. 같은 빨간색도 검붉다, 불그스름하다, 붉디붉다, 새빨갛다 등으로 표현된다. 퍼스널 컬러라는 얘기가 유행하면서 똑같은 빨간색, 파란색도 쿨톤, 웜톤으로 구분되고, 주황색도 빨간색이 좀 더 강한지 노란색이 강한지에 따라서 다른 주황색이 된다. 우리가 흔히 빨주노초파남보 7가지 색이라고 말하는 무지개 역시 사실은 끝이 없는 색들의 향연일 수도 있다. 우리는 단지 편의상 7가지 색으로만 이름 붙일 뿐이다. 가을 방학의 ‘샛노랑과 새빨강 사이’라는 곡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좋아하는 색을 물어볼 때
난 대개 오렌지색이라고 말하지만
내 맘 속에서 살아있는
내 인생의 색깔은 제 몫의 명찰이 없어
때로는 주황 때로는 등자 열매 빛깔
때로는 이국적인 탠저린이라 하지만
샛노랑과 새빨강 사이 어딘가 있어
샛노랑과 새빨강 사이 어딘가 있어
여기에 한 가지 더 덧붙이고 싶다. 내 인생의 색깔은 시시각각 변하는 중이라고.
내 안에는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검은색도 들어있었고 그 자체가 바로 나였다. 그래서 검은색을 싫어하고 부정하는 건, 나 자신을 싫어하고 부정하는 것이었다. 검은색의 내 모습을 증오할수록, 감출수록 힘들었다.
영화, 드라마, 소설 속 주인공이 한 가지 특징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사람이라는 건 그렇게 잘 알면서 왜 나 역시 그런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기 힘들까? 아마도 내 안에 있는 하이드를 끝끝내 인정하기 싫어서, 또 남들과 나 자신에게 사람 좋고 실력이 뛰어난 지킬 박사이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나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 그 사이 어딘가에 있고, 그 위치는 나도 모르게 시시각각 변한다.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유명한 주제곡 ‘지금 이 순간’은 지킬 박사가 선과 악을 분리시키는 약물을 스스로에게 처음 주입할 때 불렀던 노래이다. 노래의 멜로디와 가사에서는 엄청난 용기와 새롭게 열릴 세계에 대한 기대와 설렘 역시 엿볼 수 있다. 또한 자신이 원하던 변화를 위해 어떤 값이라도 치를 각오가 담겨 있기도 하다.
스스로를 속여왔던 거짓말에서 벗어나 진정한 나를 마주하는 일 역시 멀고도 험한 여정을 거쳐야 한다.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라며 못 본 척 뒤돌아가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큰 용기, 그다음에는 큰 변화가 뒤따를 것이다. 그 변화는 그리 먼 곳에 있는 게 아니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