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합니다. 존중해주시죠.

HSP가 뭐길래?

by 한갈피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



“너 같이 예민한 애는 처음 봤어.”


어느 날 친구에게 이런 말을 듣는다면? 우선 그렇게 말한 친구에게 화가 난다. 그리고 그다음은?

‘내가 그렇게 이상한 거야?’라는 생각이 들겠지.

게다가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듣게 된다면, 그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게 되고 결국엔

‘그래. 내가 진짜 좀 이상한가 봐. 어떡하지?’라는 결론에까지 이른다.

남 탓을 하고 남을 미워하는 것보다, 내 탓을 하고 나를 미워하는 게 훨씬 쉬운 일이기도 하니까.


그렇게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아주 작은 느낌, 아주 사소한 생각조차 믿지 못하게 된다. 내가 느낀 감정, 생각을 친한 친구들에게 물어보고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지 확인받기까지 한다. 친구들이 공감하지 못하면 내가 또 너무 예민하게 굴었구나 하면서 잊어버리려 애쓰게 된다. 감정을 잊고 덮어두는 노하우가 생길지도.


이미 느낀 감정과 생각을 부정한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되는 걸까?


적어도 얼마 전까지는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이 방법은 꽤 효과가 빨랐다. 나는 점점 무뎌지기 시작했다. 무디고 냉정한 사람인 척, 꽤 잘 연기하기 시작했다. 또다시 “예민한” 생각들이 시작되려고 할 때마다, 스스로를 꾸짖었다. 이제 보니 너무 예민하다며 나를 나무라던 친구들처럼 스스로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 친구들은 이제 내 곁에 없지만, 그 친구들의 목소리는 내 곁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아니야. 네가 틀렸어.”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할 걸? 네가 너무 앞서 나간 거야.”



애써 그런 생각들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감정을 느끼지 않으려 노력했다. 노력하면 뭐든 할 수 있다는 말은 아마 이럴 때 쓰는 걸까? 예전보다 확실히 덜 힘들고, 덜 괴로워졌다. 와! 이제 나도 행복해질 수 있겠구나!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남은 건 텅 빈 공허함뿐. 느낌과 생각을 하나둘씩 지워갈수록 나라는 사람도 점점 지워졌다.


어쩌면 내가 부정한 건 나 자신이었던 걸까.

그걸 깨닫게 된 건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도대체 예민한 게 뭐야?



예민하다고 듣기만 했지 예민한 게 뭔지, 사실 제대로 몰랐다. 그저 안 좋은 뜻이겠거니 했다.


다들 안 좋은 뉘앙스로 쓰니까. 별나다. 유난 떤다. 까다롭다. 뭐 그런 단어들의 가까운 친척쯤 되지 않을까 했다. 사전에 예민하다를 검색해보니, 예상외로 생각만큼 나쁜 뜻은 나오지 않았다.



‘예민하다 : 자극에 빠르게 반응을 보이거나 쉽게 영향을 받는 데가 있다.’



이제 보니 예민하다는 말을 미워할 이유가 없었다. 예민하다는 단어는 잘못이 없다. 그동안 애꿎은 단어만 미워한 것이다. 오히려 예민하다는 뜻은 나를 잘 설명해주는 단어였다.


자극이나 정보를 빨리 흡수한다. 사람의 분위기나 감정의 변화, 상황의 변화, 사물의 변화도 빠르게 알아차린다. 눈빛이나 행동, 말투나 어조로 상대방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어떤 감정인지, 나에게 어떤 태도인지를 직감한다.


예를 들어 친구가 급격하게 피곤한 기색을 보이거나, 언짢은 내색을 보이면 알고 싶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점쟁이라는 말은 아니다. 왜 그런지 알아내는 건 다른 문제니까. 그냥 그런 상황을 의도하지 않게 너무 잘 알아챈다. 물론 유용할 때도 있다. 이를테면 위험한 상황을 미리 감지할 수 있고, 대비할 시간을 벌 수 있다. 아마 무인도에서 살아남기나 서바이벌 게임에 참가한다면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생존자일 수도 있겠다.


예민함 덕분에 위험한 상황을 잘 모면한 적도 있고, 예민함을 믿지 않아서 위험해진 적도 있다. 또 음악을, 영화를, 책을 섬세하게 느낄 수 있게 해 주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도 볼 수 있게 도와준다. 그런데 항상 도움만 주는 건 아니더라. 너무 많은 정보가 흘러 들어오는 탓에 과부하에 걸리는 날도 있고, 모든 정보를 의미 있게 처리하려는 탓에 괜한 곳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기도 한다.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이 더 선명하듯이, 그동안 예민함을 나쁜 것으로만 생각했고 괴로움을 주는 존재로만 치부했다. 친하게 지내볼 생각은 꿈도 못 꾸고, 어떻게 하면 저 녀석을 마음속에서 쫓아낼 수 있을까 궁리만 했다.


그렇게 말 그대로 뭔가 쫓아내긴 했다. 그런데 그토록 없애고 싶었던 녀석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예민함이 싫었던 게 아니었다. 내가 힘들었던 건 예민함이 가진 그림자 때문이었다.



아,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HSP(Highly Sensitive Person)



HSP는 미국 심리학자 일레인 아론이 최초로 제시한 개념으로 매우 민감한,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뜻한다. 아론 박사에 따르면 태어날 때부터 매우 예민한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있으며, 사람들 중 20% 정도가 여기에 속한다고 한다. 다섯 명 중 한 명이 남들보다 더 예민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럴 줄 알았어, 내가 맞잖아!’



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번엔 내가 틀렸다. 이럴 줄 전혀 몰랐다. 나 말고도 예민함 때문에 힘들고, 그래서 관심이 많았던 사람들이 많았나 보다. 여기저기서 관련된 책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예민한 게 아니라 섬세한 겁니다>라는 책에서는 예민한 사람들을 ‘눈 뜬 사람’으로 비유한다. 남들이 눈을 감고 있을 때, 눈을 뜨고 있는 사람. 그래서 남들보다 좋은 것도 더 많이 볼 수 있지만, 동시에 나쁜 것도 더 많이 보는 사람이다. 작가는 눈 뜬 게 힘들다고 눈을 감아버릴 순 없지 않으냐고 말한다.


그제야 내 상황이 이해가 갔다. 나는 말하자면 눈 뜨고 있는 게 힘들다며 눈을 감고 그 위에 안대까지 둘러쓰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쁜 것들을 안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좋은 것들도 보지 못하게 된 것이다. 공허함을 느끼게 된 것, 어찌 보면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


책에는 자신이 HSP인지 아닌지 알아볼 수 있는 체크리스트가 있었다. 물론 대부분 체크했지만, 문제는 내가 HSP인지 아닌지를 아는 게 아니었다. 나는 예민함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 중에 한 명이었고, HSP 개념은 그런 내가 모르고 있던 부분을 일깨워 줬다.


예민함은 나쁘고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따라서 상담을 받거나 치료를 통해서 고쳐야 할 필요도 없다. 예민함은 자기소개에 빠지면 안 될 내 중요한 일부분이었다. 칭찬으로 자주 듣는 ‘눈치가 빠르다’라는 말도 예민함 덕분이었으니까. 상대방이 뭘 원하는지,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누구보다 빠르게 알아차리는 데 자부심이 있었으면서 이건 좋은 거니까 예민함과는 별개라고 생각했다. HSP는 예민함과도 친하게 지낼 수 있다고, 예민함이 괴로움만 주는 친구가 아니라는 걸 알게 해 줬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



그래. 너무 뻔한 말이다.


누군가 그런 말을 할 때 나도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 문구를 수 없이 들으면서도, 말하면서도 나 자신은 “다른” 사람이길 원치 않았나 보다. 다양성을 존중하라는 메시지를 읽으면서도, 나는 그 “다양한” 사람이길 꺼려했나 보다. 오히려 남들과 다르지 않길 원했고, 다양성을 존중받는 쪽이 아닌, 다양성을 존중하는 쪽이고 싶었나 보다. 이제야 이 문구가 다르게 보인다. 남들이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 먼저 해줄 말이었다.


‘저기요, 저는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라고요.’라고 남에게 말하기 전에


‘잘 들어, 너는 틀린 게 아니라 조금 다른 것뿐이야.’라고 내게 말했어야 했다.


부끄럽지만 지금까지 내 예민함이 남들과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것이라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것들, 느끼는 것들이 틀린 것이라서 날 괴롭히는 것이고, 남들에게 공감받지 못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 틀린 걸 고치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들과 달라서 공감받지 못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그만큼 조금 더 괴로운 것이었다. 고칠 것이 아니라 잘 조절할 방법을 찾으면 되는 문제였다.


그동안 내 안의 “틀린 것”들을 찾아내느라 굉장히 애썼지만, 아무리 찾아도 조금 다른 것들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예민함을 “틀린 것”으로 낙인찍었으며, 저 멀리 가둬버렸다. 멀리 돌아왔지만 다시 제자리를 찾을 시간이다.


내 예민함이, 나 자신이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이해까진 바라지 않습니다. 존중해주시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게 가능할까?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나 스스로를 이해하기조차 힘든 게 현실이니까. 그래서 이해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과 다르게 느끼는 사람을, 그 사람의 생각을 조금 존중해 주길 바랄 뿐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느끼는 나 자신을 충분히 존중할 생각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한 채 꽁꽁 숨어있어야 했던 내 생각들을 온 힘을 다해 들어줄 것이다. 이해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예민합니다. 그러니 존중해주시죠.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