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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단걸 Oct 01. 2019

"라면 먹고 갈래요?"

영화 봄날의 간다의 감동 파괴


“라면 먹고 갈래요?” 


봄날은 간다 영화 속 이영애는 너무 예뻤다.  하얀 피부에 나긋나긋한 목소리, 신비한 분위기까지. 그러나 그것보다 나는 저 말이 좋았다. “라면 먹고 갈래요? 자고 갈래요?" 여자가 먼저 남자에게 관심을 표하는 방법으로 라면 먹고 가라는 말을 던진다는 것. '봄날은 간다' 영화를 보고 나는 저 매력적인 말에 빠져들었다. 언젠가 나도 그날의 이영애처럼 마음에 드는 남자가 생긴다면 꼭 저 말을 써먹어보리라 다짐했었다. 그러나 저 말을 쓰기에는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라면을 먹고 갈 장소가 있어야 한다는 것. 즉 조리도구가 완비된 방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것. 

둘째, 남자가 라면을 먹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혹시 글루텐 프리만 고집한다던가, 인스턴트 라면이 아닌 생라면만 먹을 수 있다던가 하는 경우에는 쓸 수 없으니까. 

셋째, 라면이 항상 구비되어있어야 한다는 것. “라면 먹고 갈래?”했는데 집에 라면이 없어서 슈퍼에 뛰어갔다 오면 분위기가 깨지니까.


호시탐탐 언제쯤 저 말을 써먹을 수 있을까 기회를 노렸건만 나에게는 결정적인 결격사유가 있었다. 동생과 함께 산다는 것. 맘에 드는 사람에게 “라면 먹고 갈래? 근데 내 동생이랑 셋이 같이 먹어야 해.”라고 한다면 어느 누구든지 “아니”라고 대답할 상황이었다. 나에게는 영화 속 그 대사를 써먹을 기회가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대학교에서 만난 인연 중에 k선배가 있었다. 나에게 오빠 같은, 때로는 삼촌 같은 선배였다. 우리 둘은 누가 보면 연인으로 오해할 수 있을 만큼 매일 붙어 다녔다.  나는 항상 선배를 늙은이라고 놀려댔고, 선배는 이상하게도 나를 귀여워했다. 성년의 날에 군대 간 남자 친구를 대신해서 부러진 장미꽃을 건네 준 것도 선배였고, 군화를 거꾸로 신은 남자 친구를 욕해준 것도 선배였다. 이성적인 감정은 조금도 들어가지 않은 그저 친한 선후배 사이였다. 우리 둘은 당시에 비디오방에도 곧잘 가곤 했는데, 정말로 영화만 집중해서 보고 나오곤 했다. 한 번은 선배랑 비디오방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데 당시 만나던 남자 친구가 전화를 했다. “어디야?” 나는 비디오방이라고 k선배랑 같이 영화 본다고 무심하게 대답했고 전화는 바로 끊어졌다. 영화를 보던 선배가 벌떡 일어나더니 “이게 미쳤나? 니 제정신이가? 이거 완전 도라이네. 아무리 친해도 그렇지 남자 친구한테 내하고 영화 본다고 하면 어에노. 사과해라”라고 했다. 그날 나는 남자 친구에게 손이 발이 되게 빌었고 그쯤에서 그 소동이 끝난 것은 나와 k선배가 얼마나 친한 사이인지를 그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나를 “여자 후배”가 아닌 그냥 “후배”로만 대하는 유일한 선배였지만 밤늦게 집에 들어갈 때면 방향이 다름에도  꼭 바래다주곤 했다. 


어느 날 봄날은 간다 영화를 다시 보고 나는 초조해졌다. “라면 먹고 갈래요?” 이 말을 꼭 써먹어보고 싶었으니까. 나는 또한 사전 연습, 리허설을 해보고 싶어 졌다. 정작 실전에서 실수할 수도 있으니까. 연습 상대라면 k선배가 제격이었다. 내가 어떤 말을 해도, 심지어 욕을 해도 “허허”하고 웃고 마는 사람이었으니까. 나를 바래다주고 돌아서던 선배를 불러 세웠다. 


“선배, 라면 먹고 갈래?” 

나는 각오했다. 아무리 사람 좋은 선배일지라도 나에게 ‘미쳤나. 이게 어디서 수작질이야?’라며 화를 내거나 아무 말도 없이 그냥 돌아서버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선배는 얼마간 생각을 하더니 나에게 되물었다. 

“무슨 라면 있는데?” 

어? 이건 내 예상 시나리오에 없던 말이었다. 내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어? 어… 아마도 안성탕면?” 

선배가 말했다. 

“야. 난 신라면 아니면 안 먹어. 비싼 것 좀 먹어라 인마” 


정말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순간 발끈 화가 났다. 

“아니. 내가 라면 먹고 갈 거냐고 묻는데 반응이 그게 뭐야! 아 진짜 짜증 나.” 

그리고선 뒤돌아서서 집에 들어왔다. 


다시 영화를 찾아보니 이영애는 유지태에게 신라면을 끓여줬더라.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친구들은 나에게 이영애가 아닌 이상 통하지 않는 개수작이라고 했고 나는 단지 신라면이 아니어서 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은 것이라 주장했다. 


그때 이후로 약 10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그 대사를 써먹어 본 적이 없다. 그래도 한 번쯤은 써먹어봐야지 다짐하게 만드는 말. 


그리고 우리 집엔 참깨라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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