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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단걸 Oct 21. 2019

싸움의 기술

나는 동생들과 함께 싸움의 기술을 갈고 닦았다.



나는 ‘지금’은 싸움을 잘하지 못한다. 그 흔한 말싸움도 웬만하면 피하려고 하는 편이다. 물론 이 나이에 몸싸움은 더욱 할 일이 없다. 연인과의 다툼이 생길라치면 먼저 사과를 하고 만다. 오히려 그래서 더 큰 싸움을 불러올 때도 적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싸움을 잘하지 못하지만 ‘과거’의 나는 꽤나 싸움을 잘했더랬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공식적으로 5일마다 한 번씩 싸우셨고, (할아버지께서 5일장이 열리는 봉화장에 다녀오시면 그날 저녁은 공식적으로 할머니 할아버지의 부부싸움이 열리는 날이었다) 비공식적으로는 더 자주 싸우셨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사느라 대놓고 싸우지는 못했지만 부모님은 한번 싸우기 시작하면 집안의 집기들을 파괴하면서 싸우셨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고등학교 시절, 주말에 집에 가면 전화기가 바뀌어 있거나, 새로운 티비를 샀거나, 유리창의 무늬가 달라져있다면 두 사람이 며칠 사이에 격렬하게 싸웠다는 뜻이었다. 집안 구성원 전체가 싸움을 주기적으로 했기 때문인지 나도 한때는 싸움 꽤나 했더랬다.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 나와 싸움을 해보지 않은 친구들이 드물었다. 남자아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툭하면 치고받고 싸워댔고, 남자아이 하나를 주먹으로 때려서 쌍코피를 터트린 적도 있었고, 코피를 흘리는 그 아이 멱살을 잡고 선생님이나 부모님께 일러주면 너는 내일 또 쌍코피를 흘릴 거라는 무시무시한 협박도 잊지 않는 아이였다. 여자아이들과 싸울 때는 누가 먼저 머리채를 잡는지가 중요했다. 싸움을 잘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보통 잡기 쉬운 정수리 쪽 머리카락을 잡는데 나의 경우에는 상대방이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뒷목 쪽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친구들과의 싸움에서는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던 싸움의 달인이었다고나 할까. 내가 싸움의 달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모두 내 동생들 덕분이었다. 


나는 동생들과 자주, 꽤나 격렬하게 싸웠다. 둘째는 나와 두 살 차이이고, 셋째는 둘째와 한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기에 우리는 더욱 자주 싸웠다. 자주 싸웠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우리는 눈을 뜨자마자 서로 시비를 걸었고 잠자리에 들어서도 말싸움을 했기 때문에 싸우지 않았던 날이 더 적었을지도 모르겠다. 셋 다 개성이 뚜렷한 편이다. 맏이인 나는 이기적이었다. 흔히 맏이라면 기대하는 덕목들, 이해심, 너그러움, 양보, 리더십 등 이런 것들은 나에서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나마 둘째는 순한 편이었는데 그녀는 기억력이 좋았다. 나와 셋째에게 서운한 일들을 두고두고 이야기하는 집요함을 지녔고, 셋째는 그야말로 끝판왕이었다. 그 누구도 그녀를 이길 수 없었다. 하아….  


막내가 태어나기 전까지 우리 셋은 편을 갈라서 싸우곤 했다. 나와 둘째가 한편을 먹고 셋째를 두들겨 패거나, 둘째와 셋째가 편을 먹고 나에게 깐족거리거나 어느 날은 나와 셋째가 한편으로 둘째를 쥐 잡듯이 잡곤 했다. 셋째는 한 살 터울인 둘째에게 언니라고 부르지 않고 이름을 불렀는데, 둘째는 항상 그게 불만이었다. 나도 그런 셋째가 못마땅했다.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었던 나와 둘째는 하루 날을 잡아놓고 셋째를 흠씬 두들겨 패기로 했다. 집이 비는 어는 날, 나와 둘째는 셋째를 방으로 불렀다. 그리고 다짜고짜 셋째를 밀어서 넘어뜨렸다. 혹시나 패는 소리가 새어나갈까 봐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바로 이불을 씌웠다. 그리고 둘이서 셋째를 밟았다. 그렇게 한참을 발로 무시무시하게 밟았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우리의 예상은 셋째가 울면서 잘못했다고(무엇을?) 빌거나, 평소처럼 욕을 하면서 악을 쓸 줄 알았는데 이불속이 고요했다. 덜컥 겁이 났다. 서둘러 이불을 벗겼더니 셋째가 가드를 올린 상태로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눈물 한 방울 맺혀있지 않았다. 얘는 진짜였다. 정말 또라이였다. 나와 둘째는 셋째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언젠가 고모가 우리에게 손목시계를 사준 적이 있었다. 뚜껑이 달려있는 매우 조잡한 손목시계였지만 그 산골마을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희귀한 물건이었고, 뚜껑을 열 때마다 조악한 멜로디까지 나오는 시계였다. 우리는 그 시계를 애지중지 했다. 그러다가 셋째 시계가 고장이 나버렸다. 나였으면 멀쩡한 둘째 시계와 몰래 바꿔치기하고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겠지만 셋째는 돌로 둘째의 시계를 찍어버렸다. 본인 시계가 고장이 나버린 건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둘째가 멀쩡한 시계를 차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없었던 셋째는 그날 밤, 둘째 시계를 가지고 나가서 돌로 내리찍어버렸다. 그랬다. 내가 아무리 학교에서 싸움의 달인이었대도 집에 오면 셋째에게는 혼자 덤빌 깜냥이 아니었다. 


몇 년 전 만나던 남자 친구가 무심코 레슬링 같은 원시의 운동을 한번 해보고 싶다고 말했고 나는 냉큼 “그럼 나랑 해볼래?”라고 했다. 그는 코웃음을 치며 “너랑 뭘 해? 레슬링? 야 너 그렇게 까불다가 다쳐~” 이 친구는 나의 과거를 몰랐다. 내가 동생들이 걷던 즈음부터 원시의 운동이라는 레슬링과 비슷한 형태의 몸싸움으로 단련되어 왔다는 것을. 나는 연신 코웃음을 치며 웃는 그에게 달려들었고 우리는 바닥을 뒹굴며 레슬링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내가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그의 얼굴에선 웃음을 거두었다. 물론 내가 그를 이길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후 장난이라도 나에게 레슬링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우리 세 자매는 더 이상 그때처럼 몸으로, 또 욕하면서 싸우지 않게 되었다. 워낙 오랜 시간을 싸워왔기 때문일까. 이제는 서로가 화나는 포인트를 잘 알고 있어 웬만하면 그 선을 넘지 않는다. 주변에 나처럼 형제자매가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린 시절 형제자매 사이에 잘 싸우지 않고 컸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고, 성인이 되어선 연락도 잘하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에 기함을 했다. 우리는 심심하면 전화를 해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부모님을 놀리고, 고모 욕을 한다. 돌이켜보면 나는 동생들이 깐족거릴 때마다, 용돈이 모자랄 때마다 ‘저것들만 없었더라면’하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그런데 동생들이 있어서 나는 멧집이 좋은 삼십 대 싱글여성이 되었다.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아도, 잘 되지 않는 연애에 분노가 생겨도 그럭저럭 잘 방어하고 있다. 이 모든 게 ‘저것들’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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