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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단걸 Nov 22. 2020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시작은 거짓말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주말, 누군가의 첫사랑 이야기에 잊고 있던 나의 첫사랑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제 두 아이의 아빠가 된 녀석이지만 나의 십 대에, 사랑의 열병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해 준 내 첫사랑 말이다. 사랑은 내가 모르는 사이 부지불식간에 찾아오는 것이건만, 그 녀석이 내 첫사랑이 된 것은 순전히 내 거짓말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내가 좋아하는 아이는 탤런트 고수를 닮았다고 이야기를 하자 모두들 한껏 기대에 차 있었는데, 안동시내에서 마주친 그 녀석과 인사를 나누고 헤어져 함께 있던 친구들에게로 돌아와 저 아이가 내가 좋아하는 아이라고 소개하자 친구들은 코웃음을 쳤더랬다. “고수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야! 딱 표인봉이랑 똑같이 생겼구만!” 하아, 고수와 표인봉의 괴리라니. 한동안 친구들은 표인봉은 잘 있냐는 인사를 내게 건네곤 했다. 고수를 닮았든, 표인봉을 더 닮았든 같은 동네에서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학교를 다니고, 같은 도시의 고등학교로 진학한 그 녀석은 누가 뭐래도 내 첫사랑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일천구백구십사 년이었다. 그해 여름, 김일성이 죽었고 전쟁이 날까 두려웠던 사람들이 사재기를 하던 그 해였다. 무더웠던 여름날도, 김일성이 죽은 것도, 전쟁이 발발할 수 있다는 두려움도 몰랐던 어린 나와 내 친구들은 우리 집 앞 감나무 그늘 아래에서 재잘재잘 이야기를 하며 놀고 있었다. 우리 뒷집에 살던, 이름 끝에 ‘희’가 들어가 모두 ‘희야’라고 불렀던 친구가 갑자기 말했다.

“내 있잖아, 김 군 좋아한데이”

이게 무슨 소리람. 갑자기 소꿉친구인 김 군을 좋아한다니. 같이 발가벗고 냇가에서 목욕하고, 산속을 함께 누비고 다니던 친구를 좋아한다는 말에 나는 조금 의아했는데, 같이 있던 다른 아이들은 이미 희야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모양인지 별 반응이 없었다. 지기 싫었던 나는 대꾸했다.

“나도 금마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게 어떤 감정인지도 몰랐지만 나는 지기 싫었다. 불과 며칠 전에 김 군으로부터 ‘미쳤냐’며 ‘죽여버릴까’ 소리를 들은 나였지만 지기 싫다는 생각 하나로 나는 대꾸했다.

“야, 안돼! 내가 먼저 좋아했으니까 니는 딴 아 좋아해라”

“나도 가 좋아했다니까. 싫어”

“내가 먼저 좋아했잖아. 그니까 니는 가 좋아하면 안 돼”

“니가 먼저 좋아했다는 증거가 어딨노? 나도 가 좋아한다니까”

“포기해라”

“싫다.”

“안된다. 포기해”

우리 둘은 계속해서 실랑이를 했고, 지켜보던 아이들도 어쩔 줄 몰라했다. 결국 희야가 해결책을 제시했다.

“이럴 거면 가를 불러놓고 물어보자”

“뭐를?”

“니하고 내하고 중에 누구를 좋아하는지 말이다”

어째서 희야는 김 군이 우리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좋아한다고 확신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건 이 의미 없는 실랑이의 해결책을 제시했으므로 따라야 했다. 나는 자신이 없었다. 사실 좋아하는게 무엇인지도 모를면서 지기 싫은 마음에 마음대로 내뱉은 말을 주워 담기에는 이미 늦었다. 더군다나 며칠 전, 그 사건 때문에 김 군은 나와 말도 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워낙에 왈가닥이었던 나는, 며칠 전에 하지 말았어야 할 짓을 김 군에게 해버렸다. 학교 운동장에서 뛰어놀고 있던 나는 철봉에 매달린 김 군을 보았고, 며칠 전 당한 똥침을 만회하고자 살금살금 그 녀석 뒤로 다가갔다. 그리고 양손 모두 철봉에 매달려있던 김 군의 바지를 힘껏 내렸다. 기껏해야 팬티가 보일 거라 기대했던 내 눈에 그 녀석의 앙상한 엉덩이가 들어왔다. 내가 너무 힘 조절을 잘못해서 팬티까지 내렸나 보다 후회를 하고 철봉에서 내려와 바지춤을 올리는 김 군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내 장난으로 인해 너의 소중이를 운동장에 있던 애들 모두에게 노출시킨 점에 대해 사과를 하면서 농담으로 “근데 니 오늘 아빠 팬티 입고 완나? 우에 팬티까지 싹 내래가노?” 라고 하자 그 아이는 나를 노려보면서 대답했다. ”이씨. 오늘 팬티 안 입고 왔다. 이 가시나야. 니 미쳤나? 확 죽여 뿌까” 그 일 이후, 우리는 본체만체하면서 지냈는데 희야가 그 녀석을 불러서 둘 중 한 사람을 선택하라고 하자니. 아마 희야도 나와 그 녀석 사이에 있었던 일을 들었던 모양이었다. 결국 다른 아이를 시켜 그 녀석을 동네에 하나뿐인 다리 위로 나오라고 했고, 마침내 김 군이 그곳으로 왔다.


“왜? 왜 보자 하는데?”

나는 며칠 전에 지은 죄가 있어서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의기양양한 희야가 말했다.

“내하고 야하고 둘 다 니를 좋아하거든? 그니까 니가 우리 둘 중에 한 명 선택해라”

예상 밖의 제안에 혹은 너무 적은 선택지에 당황한 김 군이 말했다.

“싫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싫다.”

“안된다. 우리 둘 중에 한 사람을 꼭 정해야 한다.”

한숨을 푹 쉬며 한참을 생각하던 김 군은 마침내 나지막이 말했다.

“나는 시끄러운 아보다 조용한 아가 좋다.” 희야나 나나 둘 다 시끄럽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리고 둘 중 누가 더 시끄러운지 정확히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희야는 갑자기 화를 내며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뻘쭘해진 나와 그 녀석도 나란히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로 그 아이와 나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린 여전히 장난을 잘 치는 동네 친구였다. 점점 왜 그 녀석은 다른 여자아이들을 제쳐두고 나에게만 장난을 치나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나도 다른 친구들을 두고 왜 그 녀석에게만 유독 짓궂은 장난을 치고 싶은 건 지에 대한 고민이 점점 늘어났다. 결국 그건 사랑이었다. 언제 그것을 깨달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낯선 도시로 진학하고 서로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공부에 대한 고민이 늘어갈 때면 우리는 서로의 기숙사로 편지를 보냈고, 고등학생들이 할 법한 고민들을 나누었다. 중학교 때 야영장에서 했던 포크댄스 시간에 살짝 손을 잡아본 게 전부였던 풋풋했던 첫사랑이었다. 함께 안동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그 길에서, 열어 놓은 창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풀향기가 가득 찼던 그 덜컹거리던 버스 안에서, 버스 창에 기대 놓은 그 아이의 손이 참 길고 예뻤다는 기억이 내 첫사랑의 전부다. 가끔 생각한다. 혹시 그날, 희야가 그 아이를 좋아한다고 했던 그날, 지기 싫은 마음에 했던 거짓말이 아니었다면 내 첫사랑은 그래도 그 아이였을까? 그러니까 이제 두 아이의 아빠가 된 그 아이가, 고수와 표인봉을 동시에 닮은 그 아이였을까? 아마 그러지 않았을까? 그 거짓말이 아니었더라도, 손가락이 유난히 길고 예뻤던 그 아이가 나의 첫사랑이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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