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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단걸 Nov 10. 2020

저녁엔 반신욕을 합니다.

출근과 동시에 퇴근하고 싶어 지는 날에는.




그런 날이 있다. 출근하면서 퇴근하고 싶어 지는 날. 몇 달간 바쁘게 몰두했던 업무가 끝나서 바쁠 일도 없는데 차에 시동을 거는 순간, 다시 시동을 끄고 집으로 들어가고 싶은 날. 그런 날의 퇴근길은 유난히 기분이 좋다. 집에 가서 딱히 할 일은 없지만 아침부터 고대했던 퇴근길이라 무척 신난다. 집에 도착하면 나를 반겨주는 강아지들에게 서둘러 밥을 먹이고 산책에 나선다. 평소라면 차가운 바람이 싫었을 초겨울의 산책길이 오늘은 유독 상쾌하게 느껴진다. 나처럼 신난 강아지들과 찬바람을 맞으며 공원 이곳저곳을 걷는다. 이런 날에는 마이클 부블레의 재즈를 들어도 좋다. 집으로 돌아와 강아지들이 각자 자리를 잡고 코를 골며 잠을 자기 시작하면 나는 보일러 온수 버튼을 누르고 오디오에 김동률의 라이브 앨범 시디를 틀어놓고 욕조에 물을 받는다. 이런 날에는 반신욕이 제격이다.


벼르고 별러 산 로라 메르시에의 허니 배쓰 엠버 바닐라를 욕조에 풀어놓고 거품이 올라오기를 기다린다. 영화에서 보던 장미꽃잎도 넣고 싶지만, 치우기가 번거로우니 생략한다. 기다리는 동안 홍차를 끓인다. 홍차에 꿀을 좀 넣고 우유를 약간 넣어 준비를 해둔다. 욕조에 물이 어느 정도 차면 이제부터 온도를 살펴야 한다. 손을 넣어 온도를 확인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임으로 지난 경험으로 알고 있으므로 오른쪽 발끝을 살짝 넣어본다. 이 정도면 적당한 것 같아 다리를 넣는 순간 앗 뜨거 하며 서둘러 다리를 뺀다. 이십 대 때 작은 키를 보완하고자 높은 구두만 신고 다녀서 그런지 생각보다 내 발끝은 무디다. 뜨거운 물을 빼고 찬물을 좀 틀어둘까 하다가 뜨거운 물이 아까워 적당한 온도로 식기를 기다리기로 한다. 기다리는 동안 간만에 엄마에게 전화를 한다. 


“엄마, 나야. 뭐해?”

“뭐하기는, 저녁 먹고 들누 있지.”

“셋째 결혼 준비는 잘되어가고 있대?”

“아이고 야야, 가네 시어머니 될 사람이 우리 셋째 이쁘다고 난리도 아니드라.”

“아? 그래? 다행이네”

“니도 시집가가, 너그 시부모한테 이쁨 받고 살면 얼매나 좋노. 이 가씨나야아!”

아, 젠장. 왜 불똥이 나한테로 튀어. 화제 전환.

“엄마, 사과는 다 땄어?”

“말도 마라. 예년에 비해가 올해는 마, 절반도 안된다. 아이고, 참말로 이런 해가 없었다 아이가”

“그래도 서리 오기 전에 사과 다 따서 창고에 넣었으니 다행이다. 사과 따느라 엄마 아빠 고생 많았겠네”

“그래. 이 가시나야. 이래 사과 딸 때 맏사우가 와가, 좀 도와주면 얼마나 힘이 됐겠나. 이 망할년아아!”

왜 또 이 이야기의 결론이 그쪽으로 나나. 다시 화제 전환 시도.

“엄마 짝순이는 어때? 걔도 많이 늙었지?”(짝순이는 우리 집 발바리다)

“가는 뭐 잘 있지. 동네 수캐 두 마리가 맨날 밤마동 우리 집에서 보초 슨다 아이가. 참말로 우스워서”

“뭐야. 짝순이가 우리 동네 팜므파탈이네. 웃기다. 하하”

“니는 지금 쳐 웃을 정신이 있나 없나. 하다못해 개새끼도 수캐 두 마리씩이나 몰고 댕기는데, 니는 우에된게 밤에 보초 서줄 놈 하나 없나. 나는 니만 생각하면 속에서 천불이 난다. 이 가씨나야아.”

오늘도 엄마와 다정한 대화는 틀렸다. 

“엄마, 나 지금 씻어야 해. 다음에 통화해”

엄마와의 통화는 짧았는데 왜 내 몸에서 이렇게 열이 나나. 


미지근한 물에 내 몸을 녹이러 다시 욕실로 들어간다. 속에 천불이 난다는 엄마와는 달리 욕조에 받아놓은 물은 반신욕 하기 딱 적당한 온도가 되어있다. 아프리카 역사에 대한 책한 권을 들고, 이미 식어버린 홍차를 들고 욕조속에 몸을 담근다. 아, 좋다. 접어둔 책을 펴서 읽기 시작한다. 아, 벌써 지루해. 핸드폰을 집어 들고 유튜브를 켠다. 오늘 박막례 할머니는 어떤 메시지를 올려두었을까. 몇 번이나 돌려본 박막례 표 간장 국수 에피소드를 본다. 정말 쉬워 보이는데, 내일은 퇴근해서 간장 국수나 만들어 먹을까. 집중해서 보다 보면 어느새 내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한편만 더 봐야지. 결국 읽으려고 들고 온 책은 다시 접어두고서 박막례 할머니 유튜브 두 편을 보면 미지근했던 물이 천천히 식어간다. 아, 이제 일어날 시간이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욕조 속 물이 이토록 나에게 평안을 주다니. 역시, 이런 날에는 반신욕이 제격이야. 그런데 벌써부터 퇴근하고 싶어 진다. 제기랄. 그래도 퇴근을 하려면 출근을 해야 하니 욕조 마개를 열고 물을 뺀다. 물이 조금씩 빠지는 것을 보며 천천히 일어서서 샤워기를 켜고 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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