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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단걸 Oct 23. 2019

32평에 혼자 살고 있어요

내 집은 아니지만 아무렴 어때



집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집’이라는 단어에서 기대하는 것은 어떤 것 일까?

아마도 내가 집이 아닌 곳에서 겪은 모든 일, 고민, 아픔, 슬픔 때론 기쁨과 희망까지도 ‘집’이라는 공간에서는 모두 내려놓고 편히 쉴 수 있는, 직장에서의 유능한 척, 친구들 사이에서의 착한 척, 이해하기 쉽지 않은 연인의 행동도 마냥 이해하는 척 등 사회에서 요구하는 어떠한 조건에 나를 맞추느라 껴입었던 모든 옷을 벗어내고 아무것도 아닌 그냥 ‘나’가 될 수 있는 공간이 아닐까?


나는 대가족 사이에 태어난 첫 번째 아기였다. 내가 태어나기 전 우리 집의 마지막 아기는 막내 삼촌이었으니까. 그러므로 내가 ‘아기’로서 귀여움을 독차지한 기간은 불과 2년이었다. 2년 후 둘째가, 그 1년 후 셋째가 태어났으니 말이다. 나이 터울이 얼마 나지 않은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붙어 다녔는데 그 이유는 결코 서로 사이가 좋아서가 아니었다. 즉, 우리 집에는 방이 세 개뿐인지라 하나는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다른 하나는 부모님께서 그리고 마지막은 우리 셋이 함께 쓰는 방이었다. 나는 내 방이 너무 갖고 싶었지만 마당에서 텐트를 치고 생활하지 않는 이상 내 방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때의 나에게 ‘집’이란 가사노동의 공간이었다. 학교에 갔다 오면 좁은 집이었지만 각 방을 쓸고 닦아야 했고, 밥을 안쳐야 했고, 엄마가 세탁기를 돌리고 간 날이면 빨래를 널거나 널린 빨래를 개켜야 했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학교에서 오래 머물고 싶었고 심지어 주말에도 학교에 가고 싶었다. 물론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서 해야 하는 가사노동은 견딜 만했다. 내가 견디지 못하는 것은 쉴 새 없이 나를 도발하는 동생들이었다.


동생들과 싸우고 나면 문을 쾅하고 닫고는 불도 켜지 않은 내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훌쩍이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훌쩍이고 있으면 동생들이 차례로 방에 들어와서 나를 도발하는 것이었다. “야? 우냐? 진짜 우냐? 넌 뭐 맨날 질질 짜냐? 네가 그러고도 언니냐?” 그러면 나는 그쯤에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동생들의 머리채를 쥐어뜯어 놓아야 했다. 그렇게 셋이 뒤엉켜 서로 꼬집고, 머리카락을 한 움큼 뽑아내고 있을라치면 엄마가 방문을 열고 조용히 말했다. “셋 다 나와” 그다음은 안방에서 셋이 나란히 무릎 꿇고 앉아 팔을 들고 벌을 서야 했다. 나는 미치게 싫었다. 동생들과 공간을 함께 쓸 수밖에 없는 현실이, 내 부모의 가난함이, 왜 이렇게 동생들을 많이 낳아서 나에게 작은 공간 하나 내어주지 않는지.


16명이 함께 사용했던 고등학교 기숙사가 오히려 나에겐 숨통이 트이는 공간이었다. 좁은 2층 침대에 누워있어도 나에게 깐족거리는 동생들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했다. 물론 기숙사에서도 문제는 있었다. 방학이 시작되기 전, 혹은 방학이 끝나고 난 후, 그도 아니면 시험이 끝나고 난 후라던가. 우리 16명은 종종 1층 침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진실게임을 빙자한 인민재판을 했다. 각자 서로에게 서운했던 점을 이야기하곤 했는데, 그 서운함의 대상인 내가 되는 날에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변명을 해야 할지 몰라 곤혹스러웠다. 그리고 나의 친한 친구가 지목을 당하는 자가 되면 그 또한 괴로웠다.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때 당시 우린 이해할 수 없는 게 많던 17살이었다.


이제는 혼자 산 지, 6년이 되었다. 둘째 동생이 경찰공무원에 합격하면서, 셋째 동생이 건강상의 이유로 고향집으로 돌아가면서 어린 시절 그토록 꿈꾸던 혼자만의 방을 가지게 되었다. 밤늦게 퇴근해서 현관문을 열었을 때, 내 온몸과 마음으로 느껴지는 편안함, 보지도 않는 텔레비전을 켜 놓아도 뭐라고 하는 이가 없는 내 공간, 설거지 거리를 쌓아두어 주방에서 냄새가 풍기면 설거지보단 환기를 선택해도 거리낄 것이 없는 이 온전한 자유, 그래서 아무리 거지 같은 하루를 보냈었더라도 집에만 오면 나는 기분이 좋아진다. 대화할 사람이 없어도, 아니 오히려 대화를 해야만 하는 사람이 없어서 더욱 기분이 좋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더없는 행복이다.



얼마 전 집주인이 집을 내놨다는 이야길 들었고, 부동산에서 집을 보러 오겠다는 전화를 받았다. 당시는 근무 중이어서 주말 아침으로 약속을 잡았더랬다. 주말 아침, 집을 보러 온 부동산 사장님께서 현관에 들어오시자마자 ‘신랑은 일찍 나갔나 봐요?’라고 했고, 당황한 나는 얼떨결에 ‘네’라고 하고 말았다. 우리 집에 있는 남자 물건 이라고는 막냇동생 슬리퍼 하나뿐인데, 그 날은 그 슬리퍼조차도 신발장 속에 있었는데 말이다.

또 한 번은 강아지랑 산책을 하는데 아랫집에 사시는 여성분을 만났다. 둘 다 강아지 산책을 하면서 오다가다 몇 번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기에 그날도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랬더니 그분이 나에게 대뜸 물었다.

‘아직 아기는 없이 강아지만 키우는 거예요?’ 당황한 나는 또 ‘네’라고 해버렸다. 혼자서 32평 아파트에 사는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한 모양이었다. 이 집은 계약할 당시에 내가 생각한 전세자금대출 한도내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아파트였을 뿐이었다. 평수가 더 작은 집이 오히려 비쌌었더랬다. 이 아파트가 당시 전세 시세보다 쌌던 이유는 투자용으로만 거래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구구절절한 사연을 모두 이야기할 수는 없는 터라 그냥 나는 ‘네’라고 대답을 해버린 것이다.


아니다. 앞으로 또 이러한 질문을 받게 된다면 당당하게 ‘혼자 산다’ 고 해야겠다. 그래, 나 혼자서 이 넓은 집에 산다. 내 집은 아니지만 나 혼자 사는 집이 넓은게 뭐가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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