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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단걸 Sep 26. 2019

모단 걸 혹은 모던 걸(Modern Girl)  

36세, 싱글 여성, 나



   1. 회사의 대표적인 꼰대들의 행태에 답답해하며 점심시간에는 친한 동료들과 입에 모터를 단 마냥 온갖 욕을 하면서도, 얼마 전 부서에 새로 합류한 직원이 뭐든 알아서 하는 법이 없다며 “쟤는 왜 저렇게 눈치가 없냐? 눈치는 어떻게 가르치냐? 내가 처음에 입사했을 때는 말이야~”라는 말을 친구들에게 늘어놓는, 나도 모르게 꼰대가 되어버린 사람. 



   2. 어느덧 삼십 대 후반이 되어버려 이제는 흘려들을 법한데도 부모님의 결혼 안 할 거냐는 잔소리에는 “돌격 앞으로!” 정신으로 싸워대면서도, 한동안 그 잔소리가 없으면 “이제 나한테 관심이 없는 거냐”며 서운함을 표현하는 제정신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사람.



   3. 누군가가 소개팅을 해주겠다고 하면 분위기 파악도 하지 못하고 “알지? 나 얼굴 봐. 나 얼! 굴! 만! 본다고”라고 말 같지 않은 말을 늘어놓아 상대방을 어이없게 만들면서도 정작 지금껏 잘생긴 사람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불우한 과거를 가진 사람. 



   4. 어쩌다 미혼인 친구들과 만나게 되면 “야 우리 정말 오늘은 질펀하게 노는 거야! 죽으면 썩어 문드러 질 몸! 이제라도 불태우자”라며 친구들과 결의를 다지 고도, 밤 10시만 넘어가면 집에 가고 싶어 무슨 핑계를 댈까 고민하는, 배신을 밥먹듯이 하는 사람.



   5. 주변 사람들에게 “나는 절대 오래 살고 싶지 않아. 인생은 한방이야! 짧고 굵게 왔다가 가는 거지 뭐!”라고 미련 없이 이 한 세상 살고 가겠다고 장담해놓고 매일 각종 영양제를 챙겨 먹으며 운동을 하는 이중적인 사람.



   6. “나 뜨거운 상태야. 주말에 만나면 넌 각오를 해두는 게 좋을 거야” 라며 일주일 내내 연인에게 불같은 주말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고는 막상 연인이 우리 집에서 자고 가고 싶다는 낌새를 내 보이면 즉흥적으로 아픈 척하며 연기혼을 불태우는 김 빠지는 사람.



   7. 운전 매너가 바닥인 운전자들에게는 창문을 올리고 쌍욕을 하면서도 가끔 내가 하는 운전 실수에는 “이 정도 실수도 없이 운전을 어떻게 하느냐”며 나의 실수에 말도 안 되는 정당성을 부여하는, 남에게는 엄격하고 나에겐 한없이 관대한, 적어도 나에게 만은 부처 같은 사람.



   8. 6년을 만나, 결혼을 약속했던 연인이 1년이나 바람을 피운 사실을 알고는 그의 멱살을 부여잡고 시원하게 펀치를 날려주며 “내가 두 번 다시 너를 만나면 인간도 아니”라며 헤어져놓고, 몇 년이 지나 그 친구에게 내가 쓰던 텔레비전을 중고로 팔아넘긴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 같은 사람.



   9. 입으로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사람인 것처럼, 항상 싸울 태세가 되어있는 사람처럼 말을 하면서도 정작 싸워야 할 때는 겁이 나서 나서지도 못하는 비겁한 사람.



   10. 회사 엘리베이터에 함께 탄 나방을 보고 소리 지르며 기겁을 하는 직원에게 ‘왜 저래? 나방이 잡아먹기라도 하나?’라고 속으로는 욕하면서도 “우리 xx 씨는 겁이 되게 많구나”라며 하나마나한 말을 하면서 분위기를 풀어보려 하는, 어색한 분위기를 참지 못하는 옛날 사람.



서른셋이 넘어가면서 나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다 거나 인생에 대한 계획을 세워본 적이 거의 없다. 굳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오늘이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갈망하던 내일이다”라는 식상한 말을 되새기지 않더라도, 나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재밌게, 행복하게 살아가다 보면 이런 날들이 쌓여서 더 행복한 내일이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그래 온대로, 이제 누군가에게는 꼰대가 되어버렸지만, 잘 생긴 사람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불우했던 과거를 극복하고자 잘생긴 사람에게만 꽂히는, 제정신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나를 부처 같은 마음으로 바라보며, 친구들에게 소소한 배신을 곧잘 하지만 그들과 만나면 어설픈 광대역할을 자처하며 어색하지 않은 분위기를 이끌기 위해 이 한 몸 불태우며 아슬아슬하게 우정을 이어가고, 회사의 이해하지 못할 시스템에 대해서 누구보다 분개하면서도 월급날에는 회사에 대한 애정을 한껏 드러내며 경제활동을 이어가는 삶을 쌓아갈 것이다. 다이어트를 위해 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고 하면서도 매일 아침마다 체중계에 오를 것이며, 매일 저녁에는 반려견 봄이와 집 근처 공원을 산책하고 주말에는 둘이 먹을 때와 화장실 갈 때를 제외하곤 소파에 누워 티격태격할 것이다.

나의 다음 주도, 그다음 달도, 내년도, 아마 마흔이 되는 해에도.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기대하고 희망하는 게 뭐가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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