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사투리가 너무 좋아
“떡국시 좀 더 머라” 설날 아침마다 우리 집에서 듣는 말이다. 우리 집은, 우리 동네는 떡국을 떡국시라고 한다. 그에 더해 ‘떡국시 더 없니껴?”를 꼭 덧붙인다. 우리 집에서 설날 아침에 먹는 떡국은 별다른 육수를 내지 않고 맹물에 소금 간만 하고 그야말로 떡만 넣고 끓인다. 떡국이 뽀얗게 우러날 때까지 끓여 미리 쪄 놓은 만두를 올리고, 계란 지단과 김가루 및 깨소금을 고명으로 올려 심심하게 먹는다. 이제 양지머리로 육수를 만들어 떡국을 끓여도 될 만큼 경제력이 예전보다 나아졌음에도 가난할 때와 같은 맛의 떡국을 아니, 떡국시로 한 해를 시작한다.
나는 경북 봉화에서 자랐고, 고등학교는 안동에서, 대학교는 대구에서, 직장생활은 경주에서, 구미를 거쳐 이제는 경기도에서 살고 있다. 따라서 경상도 사투리, 정확하게는 경북 북부 사투리(안동사투리)에 이질감이 없지만 가끔 아빠가 하는 안동사투리를 들으면 다른 나라 말을 듣는 것 같은 느낌이 있다. 나는 어린 시절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서 키워져서 그런지 어르신들이 쓰는 알짜배기 사투리를 다 알아듣지만 직접 구사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나의 할아버지는 내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때부터 어디를 가시든지 나를 데리고 다니셨고, 어린 손녀의 말도 안 되는 질문에도 한 번도 ‘쓸데없는 소리’ 라거나 ‘시끄럽다’ 거나 하지 않고 성실히 대답해주셨다. 가을이 시작되면 메뚜기를 잡는 할아버지 뒤를 따라다니며 금복주 페트병에 할아버지가 잡은 메뚜기를 숫자를 세며 넣었고, 그런 날 오후에는 마루에 앉아 할아버지가 볶아주는 매콤한 메뚜기볶음을 하나씩 집어먹으며 할아버지의 어린 술친구가 되었다. 여름에는 금복주 페트병을 반으로 잘라 위부분을 거꾸로 넣고, 그 안에 된장 한 숟갈을 넣은 우리만의 물고기 트랩을 만들어 마을에 있는 실개천(거랑이라고 불렀다) 곳곳에 설치해놓고, 매일 몇 마리가 잡혔나 알아보려고 할아버지 바짓단을 잡고 나도 물속을 휘젓고 다녔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잡은 송사리 따위를 깨끗이 씻어 된장 한 숟가락 넣어 국을 끓였다. 또한 할아버지는 물고기를 못 먹는 나를 위해 다슬기(봉화에서는 다슬기를 골뱅이라고 불렀다)도 함께 끓여주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그럴 때는 할아버지와 함께 마루에 앉아서 나는 잘 삶아진 골뱅이를 쪽쪽 빨아먹고, 할아버지는 물고기 국을 안주삼아 두꺼비가 그려진 금복주를 한 잔씩 드셨다. 그때 나는 불과 네다섯 살이었을 테지만 아직도 선명하게 그때 마루에 앉아서 바라보던 파란 하늘 속 하얀 구름의 모양과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의 온도를 떠올릴 수 있다. 내 유년기의 가장 강력한 기억이자 내 할아버지와 함께 했던 꿈같은 시간이었다.
할아버지는 안동에서 태어나고 자라셨고, 한국전쟁 참전 이후 봉화로 이주하셨던 터라 안동사투리만을 쓰셨다. 강아지를 부를 때는 “워리 워리”라고 하셨고, 소주잔은 “고뿌”라고 하셨다. 소죽은 “쇠죽”, 소가 먹을 풀을 베러 가실 땐 “꼴 비러 간다”라고 하셨다. 동네에서 유일했던 할아버지 친구 분을 만나면 두 분은 별말씀도 없이 동네 어귀에 한참을 앉아있거나 우스개 소리를 하면서 소리 없이 웃으셨다. 할아버지를 졸졸 따라다니던 나도 그 옆에 앉아서 두 분이 나누는 우스갯소리에 깔깔대며 웃거나 나무 작대기로 땅에 내가 배운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면서 놀았다. 이제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내 고향에서 할아버지가 쓰시던 진짜배기 안동사투리를 쓰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안타깝다. 마치 할아버지의 유산이 사라지는 것만 같다. 나 또한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북한에서 왔냐는 말을 듣고는 대구 사투리를 쓰려고 노력했고, 직장생활을 하면서는 표준어를 쓰려고 노력해서 지금은 내 고향을 말하지 않으면 경상도 출신인 것을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안동사투리를 지독히 사랑하지만 나부터 그곳 사투리를 쓰는 것을 어색해하면서 고향 사투리가 사라지는 게 안타깝다는 표현이 모순일 수 있다. 그래서 설날 아침 아빠가 “떡국시 좀 더 머라”라고 했을 때 반가웠다.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우리 고향에서는 손님이 와서 헛기침을 하거나 “있니껴?”라고 인기척을 내면 누가 온 지 뻔히 알면서도 괜히 “누구로” 하며 다시 인기척을 낸다.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왔니껴? 하는 것이다. 가끔 시골집에 있을 때 동네 사람들이 놀러 오면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듣는다. “다리 다 글라?”는 말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더나” 하는 말이다. “맹 그매이 그매이드라”는 말은 “그게 그거지”라는 뜻이고 혹시 물건이 탁자 위에 위태로운 상태로 있으면 “저거 치아라. 널찐다” 는 말은 “저거 치워라. 떨어진다”는 말이다. 다과로 내온 귤이 좀 시면 “뭐가 이래 쌔구랍노”라고 한다. 이것은 “많이 시다”는 뜻이고, 누군가를 뒷담화를 할 때면 “그 사람은 뭐가 그래 어구씬지 몰래”라는 표현은 “그 사람은 참 억세다”는 말이다. 혹은 “그거는 가지끈 잡아야 대”라고 하면 “그건 꽉 잡아야 해”라는 표현이다. 손님이 가실라치면 “왜요, 더 노다 가지”라고 한다. “왜 좀 더 있다가 가지”라는 뜻이며 이럴 때 손님은 ”아이래. 가이대”라고 하며 일어선다. 그럼 아빠는 함께 일어나서 배웅한다.”가시대이”
흔히 우리 동네 사투리(안동사투리)의 가장 큰 특색 중의 하나는 어미가 다른 경상도 사투리와 다른 것이다. ~껴, ~더, ~로(노), ~라 정도로 분류할 수 있다. ~껴는 좀 나이 드신 분들이 사용하는 어미로 “밥은 자셨니껴?” “병원은 갔다왔니껴?”정도로 공손한 표현의 의문형 어미이다. ~더는 “밥은 멋니더”, “병원은 갔다왔니더” 로 쓸 수 있는 종결형 어미이다. 둘 다 높임 표현이다. ~로(노)는 “니는 아가 왜 그래 촐싹대노”, “야 이노마야, 니는 왜글로” 로 사용될 수 있다. ~라는 “야가 야 언니라?”, “니가 이제 대학생이라?” 로 사용되며 동기간이나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쓰는 좀 더 친근한 표현이다. 내가 생각하는 안동사투리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억양이다. 대구나 부산과는 다르게 좀 더 부드럽고 말이 빠르지 않아 듣기에 좀 더 편안하다. 예외적으로 우리 아빠처럼 말이 빠른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는 말이 느리고 억양이 부드러운 편이다. 안동사투리를 제대로 느끼려면 안동하회탈춤을 보면 된다. 몇 년 전, 혼자서 하회탈춤을 보러 갔었다. 나처럼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서 커서 안동사투리를 알아듣는데 문제가 없는 사람이 보면 이해하는데 어려울 것이 없지만 타 지역 사람이거나 같은 경상도일지라도 북부지역이 아니라면 이해가 좀 어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이 진짜 안동사투리였다.
현재 셋째 동생과 막냇동생은 고향에 살고 있다. 가끔 내가 셋째 동생을 놀리면 그녀는 나에게 조용히 한마디 한다. “주차댕겨분다”(차버린다). 나는 셋째가 그곳 사투리를 구사하는 게 너무 귀엽다. 본인은 표준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나는 셋째도, 막내도 그곳에서 계속해서 그곳 사투리를 써주면 좋겠다. 그리고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은퇴해서 고향으로 내려가면 같이 맹물에 소금간만을 더한 심심한 떡국시를 끓여 서로의 안녕을 빌며 “떡국시 좀 더 머라”고 정겨움을 표현하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가 쓰던, 그리고 우리 아빠가 쓰는, 형체가 없는 그들의 억양과 단어들이 우리를 통해 계속 이어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