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히는 여자가 뭐가 어때서

내 여자 친구가 밝히는게 좋으면서 싫으면 어쩌라고

by 모단걸




얼마 전 화장대 정리를 하다가 알게 되었다. 전 남자 친구가 두고 간 콘돔이 없어졌다. 콘돔을 계속해서 들고 다니기 귀찮다며 우리 집에 놓고 갔는데, 그 사이 우리는 헤어졌고 나는 그가 두고 간 콘돔을 화장대 서랍에 넣어놓고 잊고 있었다. 그게 벌써 1년 정도 되었다. 콘돔이 있다는 것도 잊고 있었는데 화장대 정리를 하다가 콘돔 파우치가 비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대체 그 콘돔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 사이에 우리 집을 방문한 사람은 동생들과 부모님이 전부인데 대체 누가 가져간 것일까? 부모님은 아닐 테고, 애기를 갖기 위해 노력 중이라는 둘째도 용의 선상에서 제외하면 막내와 셋째 동생만 남는데, 막내는 절대 내 화장대 서랍을 보는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에 셋째가 유력하다.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어쨌든 나는 쓸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하고 가져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렇게 반박한다면 나는 할 말이 없는 상황이긴 하니까.


내가 결혼은 하지 않더라도 연애는 하며 지내면 좋겠다는 둘째의 말에 ‘난 요즘 남자랑 자고 싶지가 않아.’라고 대답했다. 동생은 내 말에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정말 난 왜 이렇게 변한 걸까? 단지 내가 나이가 들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과거에 이미 많은 경험을 해서일까? 그도 아니라면 나에게서 벌써 열정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스무 살에 첫 남자 친구를 만났다. 그도 연애가 처음이었고 나 또한 처음이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할 수 있는 모든 육체적 관계에 우리는 처음이었다. 이미 친구들에게 첫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누군가는 너무 아파서 울었다고 했고, 누군가는 결국 몇 번의 시도 끝에 하지 못했다고 했었고, 또 누군가는 너무 능숙한 남자 친구에 실망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모텔을 찾아 해운대를 걸으면서 나도 그런 걱정을 했다. 겨우 찾아낸 낡아빠진 해운대의 여관방에서, 화장실 문이 고장 나 닫히지 않는 그 여관방에서 나는 첫 경험에 대한 걱정보다 화장실을 못 가는 게 더 걱정이었다. 혹시나 그가 내가 볼일 보는 소리를 들을까 나는 결국 생리현상을 참는 선택을 했다. 그도 나도 모든 게 처음이었기에 서투른 몇 번의 시도 끝에 우리는 서로의 처음을 경험했다. 그때의 나는 첫 섹스에 두려움과 설렘 따위는 느끼지 못했다. 그저 화장실이 가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다음 날 아침부터 내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그는 혹시나 전날 밤, 우리가 나누었던 육체적 관계로 인해 내가 아픈 것으로 생각하고 버스 뒷자리에서 안절부절못하지 못했다. 해운대에서 구포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한 손으로 그의 손을 부여잡고 다른 한 손으로 배를 부여잡고 식은땀을 흘렸다. 결국 구포역에 버스가 도착하자마자 나는 남자 친구 손을 뿌리치고 화장실로 달려갔고, 그렇게 평화를 찾았었다. 내가 화장실에서 밝은 얼굴로 나오자 남자 친구는 바닥에 주저앉아 거의 울다시피 웃었고 그렇게 전혀 설레지 않던 첫 경험은 끝났다.


그 후 만난 남자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나는 완전히 변했다. 둘이 함께 밤을 지새우고도 도서관에 자리를 맡아두기 위해 새벽에 도서관에 가기도 했다. 길거리에서 싸우다가 내가 좀 밀린다 싶으면 조용한 데서 이야기를 하자며 휘적휘적 앞장서서 모텔로 갔다. 남자 친구가 뒤에서 따라오며 ‘이야기를 마저하자’고 짜증을 내도 나는 대꾸도 없이 모텔로 그를 인도했다. 모텔 입구에 서서 모텔을 가리키며 조용한 데서 이야기 좀 하자고 하면 그는 어느새 씩 웃었다. 그런 날에는 우리는 몸으로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잠재우지 않았다. 소심한 그에게 비해 적극적인 여자 친구인 나는 침대에서 그에게 적극적으로 주문을 했다. 이렇게 좀 해줘. 너는 어떠니? 나는 이게 좋은 거 같은데? 우리 롤 플레이하는 게 어때? 나는 때때로 야한 속옷을 입고, 어떨 때는 그의 손을 움직이지 못하게 잡고, 눈을 가리기도 했다. 가끔 그는 나를 안고 말했다. ‘니가 밝히는 게 좋아’ 그러면 나도 그에게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나도 내가 밝히는 게 좋아’ 나는 침대에서 소심하고 싶지 않았다. 내 몸에 대해서 내가 가장 잘 알고 싶었다. 그랬기에 나는 언제나 침대에서 밝히는 여자이고 싶었다. 어쩌다 침대에서 본인이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적극적인 나를 문란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남자를 만나면 피곤했다. 그런 사람과 할 때는 괜히 널 위해 내가 더 움직이겠다며 그를 꼼짝하지 못하게 했다. 그가 제대로 하지 못할 거면 나라도 제대로 하는 게 나으니까.


내가 만난 대부분의 남자 친구들은 적극적인 나에게 맞춰 함께 적극적으로 변해갔다. 그래서 싸우더라도 침대에서 시간을 보내면 대부분 싸웠던 원인의 온도는 낮아지곤 했다. 그런데 우리 집에 콘돔을 두고 간, 거의 한 뭉치의 콘돔을 두고 간 그는 나를 아주 미치게 만들었다. 한 뭉치의 콘돔을 가지고 온 그의 패기는 그의 미숙함에 가려졌다. 물론 그 미숙함의 의미는 침대에서의 스킬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물론 없긴 했다.) 이를테면, 내가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도 나에게 느낄 것을 강요했다. 또 몇 번을 하더라도 할 때마다 내가 무언가를 느끼길 원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니가 원하는 그것을 내가 하지 못할 것 같다고 하면 그는 벌컥 화를 냈다. 혹시 전 남자 친구를 생각하느냐고, 걔는 잘했었냐는 도저히 해서는 안 되는 말을 내뱉었다. 그런 일이 반복이 될수록 나는 그가 우리 집에 오는 것이 불편했고, 더군다나 자고 가는 것은 소름 끼치게 싫었다. 그래서 헤어지기 전에 그가 콘돔 한 뭉치를 들고 왔을 때, 나는 그와 헤어지길 또다시 결심했다. 그는 내가 적극적인 게 좋다고 하면서도 나의 과거를 끊임없이 의심했다. 전 남자 친구와도 그랬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내 여자 친구가 침대에서 밝히는 게 좋으면서도 그게 싫은 거였다. 어쩌다 그 전 남자 친구가 우리 집에서 한 달을 지낸 적이 있다는 사실을 그가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나에게 그랬다. “이혼한 것보다 동거한 게 더 나쁘다”라고. 이혼한 것이나, 동거를 했다가 헤어진 것이나 대체 뭐가 나쁘다는 것인지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그는 가끔씩 나를 지저분한 과거를 지닌 사람으로 몰아세웠다.


이제 연애를 하지 않은지 1년 정도 되었다. 아직도 나는 남자랑 자고 싶은 마음이 없다. 마지막 연애에서 받은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않은 것 같다. 그가 침대 위에서 생각 없이 내뱉었던 그 말들이 아직도 생각나는 것을 보면 말이다. 물론 나는 또다시, 언젠가는 새로운 연애를 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 또 연애를 하게 되면 그때도 여전히 밝히는 여자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처럼 밝히는 남자를 만나고 싶다. 나와 같은 취향을 가진, 서로의 과거를 의심하지 않고, 현재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사람이면 나는 여전히 밝히는 여자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침대 위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게 뭐가 어때서, 그리고 밝히는 여자가 뭐가 어때서, 그게 내가 되면 뭐가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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