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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단걸 Aug 03. 2020

시인이 되고 싶었어요.

어쩌다 글쓰기를, 어떤 글쓰기를.



나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나의 어린 시절에. 시가 무엇인지도 잘 몰랐던 십 대에 말이다. 그 시작은 이러했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동시를 한편씩 써오라고 숙제를 내주었다. 물론 동시가 무엇인지 어떻게 쓰는 것인지 잘 몰랐지만 교과서에 실린 동시에서, 혹은 학교 복도에 걸려있는 선배들의 시화에서, 동시의 형태가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세로로 길게 쓰는 것과 짧게 쓰는 글. 그 정도가 내가 알고 있는 동시의 전부였다. 그 정도 지식을 가지고 쓸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기에 나는 내가 본 것을 그대로 적어 냈다. 물론 짧게, 세로로 써서 말이다. 주제는 모내기였다. 마침 모내기 철이기도 했고 동시 숙제를 하던 그때 우리 집에서 모내기를 하고 있었다는 단순한 이유였다.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대략 적어보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모내기


봄이 깊어지면 

아빠는 모내기를 한다.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모내기를 한다. 


논둑에 둘러앉아 새참을 먹고

다 함께 모내기를 한다.


논에 물이 찰랑찰랑 차면

아빠는 모내기를 한다. 


느낌을 적거나 감상을 적는 것이 아닌 그냥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적어서 제출한, 내가 태어나서 처음 쓴 동시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 복도에 걸렸다. 내가 지나다니며 부러워하던 그 자리에 말이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좀 더 흐른 후에 담임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내가 쓴 시를 잡지에 보냈었는데 잡지에 실렸다며 나에게 재능이 있으니 동시 공부를 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날 그 잡지를 집에 가지고 와서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모르겠다. 선생님이 건네주는 동시를 읽고 또 읽었다. 나에게 나도 모르는 재능이 있다며 기꺼이 나를 가르쳐주는 선생님을 만나자 나의 어설펐던 글쓰기 실력은 늘고 또 늘었다. 그 이후 교내 백일장이든, 교외 백일장이든 계속해서 상을 받아왔다. 그래서였을까. 초등학교를 졸업할 당시에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시인을 꿈꾸게 되었고, 당연히 시인이 될 거라 생각했다. 얼마나 오만했던지, 십 대의 나는.


중학교에 입학을 하고 곧이어 열린 교내 백일장에서 나는 예상대로 상을 받았다. 심사를 맡았던 국어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참으로 독특하며 이런 것을 재능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나를 알아봐 주는 선생님을 만나자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선생님, 저는 시인이 꿈이에요. 윤동주 시인 같은 시인이 요” 국어 선생님은 나에게 시인이 되려면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해야 하고, 많이 써봐야 한다며 본인이 주제를 내주면 내가 시를 써오고, 그 시를 함께 보는 게 어떻겠느냐며, 한번 해볼 생각이 있냐고 물었고 나는 기꺼이 하겠다고 했다. 그날부터 나는 선생님이 내주는 주제에 대해 시를 썼고, 시가 잘 써지지 않을 때면 선생님은 며칠이든 기다려주셨다. 내가 쓴 시가 꽤 괜찮은 날이면 선생님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항상 나에게 사물을 바라볼 때, 그것에 대해 생각할 때 독특한 시선을 가지고 있다며 칭찬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되도록 창의적인 무언가를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내가 성의 없이 시를 써오거나 말도 안 되는 시를 써온 날에도 선생님은 비난이나 질책보다는 더 잘할 수 있는데 시간이 없었나 보다 하며 나를 감싸주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시를 쓰는 공부를 하자 나는 여전히 교내든, 교외든 백일장에만 나가면 상을 받아왔다. 나의 자신감이 하늘을 찌를 무렵 학년이 바뀌었고, 국어 선생님은 전근을 가셨다. 그때 나는 조금 울었다. 


그리고 만난 새로운 국어 선생님은 교외 백일장에 학교 대표로 내보낼 학생을 찾다가 다른 선생님들께 내가 제일 잘 쓴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를 불렀다. 다짜고짜 내일까지 시 한 편을 써오라고 했다. 새 국어 선생님께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나는 정성 들여 시를 써갔고, 선생님께 드렸다. 가만히 앉아 내가 써 온 시를 읽던 선생님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제일 잘 쓴다며? 근데 이것도 시라고 써온 거냐? 이건 쓰레기다. 쓰레기!” 하면서 종이를 내던졌다. 정말 지금 같아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무엇이 그렇게 그 선생님을 분노하게 한 건지 나를 노려보기까지 했었다. (물론 나를 노려보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겁에 질린 나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래도 마땅한 학생을 찾지 못한 국어 선생님은 어쩔 수 없이 나를 교외 백일장에 내 보냈고 당연하게도 나는 입상하지 못했다. 그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혼자서 조용히 절필 선언을 했다. 다시는 시를 쓰지 않으리라. 그저 시를 읽는 사람으로 남으리라. 


그때 만약 내가 그 선생님의 말에 더욱 악에 받쳐 시인이 되고자 하는 꿈을 더욱 단단히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결국 시인이 되었을까? 아니.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와 생각해봐도 나에게는 시를 쓰는 재능은 없었다. 두 명의 선생님이 나에게 재능이 있다고 했었지만 그건 아마도 내가 다른 아이들과 약간 달랐던 지점을 재능이라고 착각하셨던 것이었을 거다. 어쨌든 혼자서 조용히, 마음속으로 절필 선언을 하고 난 이후 나는 나의 다른 재능을 찾으려 더욱 열심히 공부했었다. 열다섯 살의 내가 한 선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다. 


비록 나는 시인이 되지 못했지만 산책길에 만나는 길가의 풀 한 포기를 볼 때 생각한다. 이 풀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까? 매 순간 다른 온도와 습도를 싣고 나를 지나쳐가는 바람을 느낄 때면 이 바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생각한다. 노을이 깊은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 아래 선 가로등 불빛을 올려다볼 때, 깊은 밤 달빛 아래 서있는 가로등 불빛을 올려다보며 나는 생각한다. 어떤 단어로 이 불빛을 그릴 수 있을까. 시인은 아니지만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한다. 어떤 단어로 나의 감정을 표현할지, 어떤 표현들로 세상을 독특하게, 재미있게 그릴 수 있을지. 

또한 나는 소설가는 아니지만 퇴근길에 내 앞에서 신호 대기를 하고 있는 차를 보며 저 안엔 어떤 사람들이 타고 있을까. 혼자 사는 사람일까,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일까, 저 사람은 오늘 저녁은 무엇을 먹을까 하며 엉뚱한 생각을 한다. 길을 걷다 나를 스쳐가는 사람들을 보며 상상한다. 지나치는 사람들의 옷차림과 표정, 목소리와 말투로 각자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과연 고단하기만 한 삶일지, 인생을 즐기며 살고 있는 사람인지, 그들의 인생은 어떤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지 상상한다. 나는 소설가는 아니지만 소설가처럼 상상한다. 

프로 작가는 아니지만 나는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내가 했던 비슷한 경험들을 떠 올리고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풀어낼까 고민한다. 특히 부모님을 관찰할 때면, 어떤 상황일지라도 재미있는 점을 찾으려 한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쓸 때 그 누군가가 읽더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 번에 읽어 내려갈 수 있도록 문장의 호흡과 긴장을 고민한다. 어떤 구조로 글을 전개해야 읽는 사람의 흥미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을지 생각한다. 


아마추어 작가이지만 시인이 아니어서, 소설가가 아니라서, 프로작가가 아니기에 더 솔직하게 나의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프로는 아니지만 글을 쓰는 동안 나는 한껏 오만해진다. 쓰는 동안만은 이런 글은 나 아니면 못쓰지, 나라서 이렇게 재밌게 글을 쓰는 거지 하하하하 하며 기고만장해하며 글을 쓰다가도 글을 완성하고 나면 나는 비로소 소심해진다. 혹시 내가 선택한 단어들에 문제가 있으면 어떡하나, 내가 쓴 글로 인해 누군가가 상처를 받으면 어쩌지? 혹시나 시대정신에 반하는 글은 아닌가. 나의 기억이 틀렸으면 어떡하나. 쓰는 동안은 자신감에 차서 써 내려갔으면서 완성하고 나서 한껏 소심 해지는 건 무슨 심리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렇게 글을 쓴다. 


굳이 시인이나, 소설가 또는 프로작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시인이며, 소설가이고, 한 편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작가들이지 않은가. 


그래서 내가 쓴 글을 브런치에 올릴 때마다 나는 다시 나를 설득한다. 혹시 오늘 내가 쓴 글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시대정신을 담지 못할지라도 미래의 조금 더 여유롭고 성숙한 나를 믿어야지. 미래의 내가 잘 수습할 테지. 내일의 내가 오늘 내가 싼 똥을 치우겠지. 누구든 본인이 싼 똥을 치울 사람 한 명쯤은 있지 않나. 그게 미래의 내가 될지라도. 그래서 지금의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재미있게 써내려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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