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88만 원 세대였다.

by 모단걸


엄마는 나를 앞에 앉혀놓고 울었다. 평소의 모의고사 점수보다 한참 낮은 내 수능 성적으로 지원 가능한 대학교를 찾기 위해 전국 대학 순위표를 펼쳐놓고 아빠와 이마를 맞대고 고민을 하던 와중에 엄마가 나를 조용히 안방으로 불렀다. 엄마는 울었다. 꼭 대학교에 가야 하겠냐며 벌게진 눈으로 나에게 물었다. 엄마는 무섭다고 했다. 이토록 가난한 집에서 나를 대학에 보내자면 또 빚을 내야 하는데 꼭 4년제 대학을 가야겠느냐고, 요즘 대학 졸업생들은 취업도 안된다고 하는데 굳이 대학교를 가야겠냐며 울었다. 학창 시절 내내 대학교를 가기 위해 공부했던 나에게 대학교 말고 다른 길이 무엇이 있겠나 싶었던 나는 악을 쓰며 울어댔다. 안방에서 나는 소란한 소리에 아빠가 들어왔다. “애가 안 간다면 몰라도 간다고 하는데, 부모가 힘들다고 안보내면 안되지” 라며 엄마를 나무랐다. 결국 나는 지방 국립대와 지방 사립대에 원서를 넣었고, 대학 입학보다 어렵다는 기숙사도 3곳이나 합격했다. 어쨌든 둘 다 ‘지잡대’였지만 아빠는 조금 더 인지도 있던 사립대학교를 종용하였고, 대학교에 가는 것 자체가 중요했던 나는 아빠가 원하는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예상했지만 나의 대학생활은 쉽지 않았다. 한 달 용돈은 겨우 10만 원이었다. 세끼 밥은 기숙사에서 해결할 수 있었지만 교복이 없는 대학생활은 나의 초라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청바지 두 벌을 돌려 입어야 했고, 하나뿐인 운동화가 젖으면 슬리퍼를 신고 학교에 가야 했다. 휴대전화 요금을 내고, 친구들과 몇 번 술을 마시면 10만 원은 금세 바닥이었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했고, 장학금을 받아야만 했다. 활발한 성격 탓에 친구들과도 놀아야 했다. 나는 공부도, 일도, 연애도, 노는 것도 어중간했다. 어쨌든 새벽 한두 시까지 일하고, 학교에 다녔다. 성적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근로 장학금을 받으려 학과 사무실에서 일을 했고, 외부 장학금을 받으려 며칠밤을 세워서 신청서를 작성했다. 생활비를 버느라 힘들었지만 부모님의 지원 덕에 운 좋게도 학자금 대출 없이 대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 사회 선생님이 되려 임용고시를 목표로 대학을 졸업했지만 임용고시에 떨어졌고, 더 이상 도전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렇게 백수로 사회에 던져졌다.


대학생이 아닌 나는 초조해졌다. 주변인들은 하나같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고 나도 그 물결에 동참했다. 그러나 엉덩이는 컸지만 무겁지 않았던 나에게 진득하게 앉아서 공부하면 합격할 수 있다는 공무원 시험은 쉽지 않았다. 결국 나는 한 공기업의 비정규직으로 취업했다. 한 달 월급은 겨우 120만 원 남짓이었다. 월세를 내고, 공과금을 내고 나면 생활비를 충당하기에도 빠듯했다. 그러나 적은 월급에도 불구하고 가장 슬픈 것은 주변인들의 시선이었다. 그렇게 돈을 들여서 사립대를 나오고도 비정규직으로 일한다는 사실에 다들 내가 게을러서, 노력이 없어서 그렇다고 단정했다. 회사에서 마주하는 4,50대의 직원들은 나와 다른 비정규직들에게 거리낌 없이 이야기했다. '꼬우면 공부해서 여기 들어오라’고. 그럴 때면 속으로 욕을 했다. ‘썅놈의 새끼들, 지들은 시절을 잘 만나서 공부하지 않고도 이런 공기업에 들어올 수 있었는데, 지랄하고 자빠졌네’ 사실 아니꼬웠지만, 비록 월급이 120만 원 남짓이더라도 계속해서 일하고 싶었다. 내 노동력을 그렇게 싸게 후려쳐서라도 계속 일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11개월씩 계약을 연장했고, 그곳에서 22개월을 일하고 나자 더 이상 재계약도 되지 않았다. 나는 내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자격증을 취득하고서야 경주에 있는 한 외국계 회사에 면접 기회를 얻었다. 다행히 이곳은 비정규직은 없었고 모든 직원들이 정규직이었다. 연봉 1,800만 원의 공고였지만 면접 자리에서 사장님이 말했다. ‘만약 1,800만 원의 연봉을 못주겠다고 하면 어쩌실 건가요?’ 절박했지만 나는 당당히 말했다. “회사에서 직접 게시한 취업공고 속의 약속도 지키지 않는 회사라면 저도 함께 일 할 생각은 없습니다.” 사장님은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지 300만 원의 연봉을 더 얹어서 연봉계약서를 제시하였고 그렇게 나는 대학을 졸업한 지 4년 만에 정규직이 되었다. 면접 자리에서 바로 연봉계약서를 제시하며 함께 일하자고 하는 사장님과 악수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그 길가에 피었던 새하얀 벚꽃이 나의 앞날을 축복해주는 듯했다.


그때로부터 약 10년이 지났다. 한 팀에서만 경력을 쌓아오고, 부족한 관련 직종 공부를 해오다 보니 나의 연봉은 꽤나 올랐고 다행히 정규직으로 계속해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내가 대학교에 입학한 때로부터 약 20년이 흘렀다. IMF의 여파가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지배하던 때에 대학생이 되었고, 졸업을 했다. 긍정적인 성격의 나도 한동안 우울했고,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갯속을 걷는 느낌을 느꼈더랬다. 나보다 앞서 걸었던 선배들이 부러웠었고 때때로 그들을 욕했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청년들을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을 느낀다. 당신들이 걷고 있는 그 길을 먼저 걸어온 선배로써, 좀 더 편히 그 길을 닦아놓지 못하고 오히려 자갈만 던져놓고 온 것은 아닌가 하는 그런 마음 말이다. 그들에게 나도 힘든 시간이 있었지만 결국엔 내 생활에 만족하고 지내는 날이 온 것처럼 당신들도 그럴 것이라는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그저 미안하다고, 힘내자고, 하루하루 잘 넘겨내다 보면 당신들의 날이 온다는 것을 나는 믿고 있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을 뿐이다. 당신의 가치는 당신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터이니 주변인들의 인식과 생각들에 지배당하지 말기를. 천천히 하루하루 걷다 보면 걸어온 그 길은 오롯이 나의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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