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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단걸 Dec 16. 2020

과수원집의 자식농사

농사짓듯이 우리를 키우신 부모님



나는 사 남매의 맏이다. 내 밑으로 여동생 둘과 남동생이 하나 있다. 나는 외국계 회사에 근무 중이고, 둘째 여동생은 경찰공무원, 셋째 여동생은 공기업에 다니며, 막냇동생도 공무원이다. 그래서 우리 가족을 아는 사람들은 우리 부모님이 자식농사도 꽤 잘 지었다고 평가한다. 나도 우리 형제들이 사고 한번 치지 않고, 부모님 속을 크게 썩인 적도 없이 건강히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부모님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한다. 해가 뜨기도 전에 과수원에 나가야 하고, 해가 지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오는 부모님이기에 우리들에게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당장 빚을 갚아야 하는 현실 앞에 우리의 장래는 먼 미래였을 테니까. 그러나 시간이 지난 후,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들은 자식들에게 관심이 없었다기보다는 기본적으로 자식들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공부를 재밌어하는 아이들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공부를 할 테고, 공부에 흥미가 없는 아이들은 또 다른 잘하는 것이 있으리라는 생각. 따라서 성적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성적이 오르더라도 크게 기뻐하거나 실망해서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우리가 학교에서 상을 받아와서 부러 잘 보이는 곳에 올려두어도 못 보고 지나치기 일쑤였고, 답답한 내가 “엄마. 나 오늘 학교에서 상 받았어!”라고 상장을 보여주면 엄마는 힐끗 쳐다보고는 “그래, 잘했네” 하는 게 전부였다.  다른 친구들을 제치고 상을 받아왔는데도 기뻐하지 않는 부모님이라니! 사립대학교에 다니면서 기를 쓰고 공부를 해서 성적 장학금을 받아도, 어떤 해에는 외부 장학금을 받아서 등록금보다 더 많은 장학금을 받아도 부모님은 그저, 할 만하니 받은 거라 생각했고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에잇, 뭐야 이렇게 몇백만 원을 받아와도 기뻐하지 않는 부모님을 보고 좀 실망한 나는 다음부터는 좀 쉬엄쉬엄 학교 생활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지기 싫어하는 성격상 시험기간이 되면 또 밤을 새워가며 공부를 했더랬다. 그렇게 칭찬에 인색한 부모님이었지만 용납하지 못한 것 중에 하나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등수가 떨어지더라도, 시험을 지난번보다 못 보더라도 항상 부모님께 성적표를 보여드렸는데 내 여동생들은 성적표를 집에 오는 길에 갈기갈기 찢어서 버리거나, 집에 오자마자 아궁이에 넣어 태워버리거나, 다급한 경우에는 입에 넣고 씹어 먹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또 엄마에게 일러주었다. “엄마! 오늘 학교에서 전부 성적표 나눠줬는데, 얘네는 오다가 버렸어!” 동생들이 눈을 길게 뜨고 나를 노려보아도 나는 못 본척했다. 동생들은 엄마한테 먼지 나도록 맞고도 그 다음번 방학식에서 또 똑같은 짓을 했더랬다. 


아무래도 부모님께서 농사를 짓다 보니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농사일을 거들었다. 고추를 심고, 고추밭에 김을 매고, 사과 적과 작업을 하고, 감자를 캐고, 고추를 따고, 사과를 땄다. 고작 열한 살, 열두 살이었던 우리는 주말이면 밭에 끌려가야 하는 현실이 무척 싫었고, 어떻게 하면 도망을 칠까 고민을 했지만 우리가 도망칠 곳은 없었다. 입이 잔뜩 나와서 햇볕이 내리쬐는 고추밭에서 하루 종일 고추를 따고 집에 내려갈 때면 우리가 고추를 딴 곳과 아직 따야 할 곳이 남은 고추밭이 초록색과 붉은색으로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을 보고 나는 약간의 뿌듯함을 느꼈다. 주렁주렁 달린 빨간 사과를 따는 날에는 누구보다 조심해서 사과를 땄다. 이 사과 한 알을 따기 위해 나와 동생들은 1년 동안 주말마다 과수원 일을 도왔기 때문에 이 사과 한 알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농사일을 짓는 부모님의 고생이 어떤 것인지 우리의 마음에 새겨졌다. 두 사람은 오로지 노동력으로만 가족들을 부양했다. 지금 당장은 이토록 힘들지만, 열심히 일을 하다 보면 가을에는 달콤한 사과를 딸 수 있다는 것을 나의 부모님을 보며 깨달았다. 또한 노동의 가치가 인정받는 사회, 육체노동자가 존중받아야 마땅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안에 각인시켰다. 따라서 우리 형제들은 부모님이 그래 온대로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생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부모님은 우리에게 꿈을 정해준 적이 없다. 우리들에게 ‘너는 이걸 해야만 해. 부모인 우리 뜻대로 해’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임용고시에 떨어지고 팽팽 놀고 있던 나에게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보면 어떻겠느냐 의견을 제시했었고, 내가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지 않겠다고 했을 때도 별 말이 없었다. 공대를 간 막냇동생이 갑자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고 했을 때도, 동생의 선택을 지지했을 뿐이었다. 내가 은행권 취업에서 실패하고 일반 기업으로의 취업을 준비할 때도 그러려니 하며 지켜보았다. 단 한 번도 ‘너는 이걸 잘하니 이쪽으로 가라.’며 우리의 꿈을, 우리의 미래를, 우리의 한계를 정해준 적이 없었다. 아마 그 바탕은 ‘믿음’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부모가 나서서 자식이 갈 길을 정해주지 않아도, 알아서 자신의 길을 걸어갈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가끔 우리는 이야기한다. 

“우리 엄마 아빠처럼 자식들한테 관심 없는 부모도 없을 거야.” 

“근데 만약에 엄마 아빠가 다른 부모들처럼 이거 해라, 저거 해라 그랬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잘 안되면 부모탓을 했겠지. 그리고 우리들 성격상, 엇나갔겠지.” 

“그건 그래.”


우리 부모님은 둘 다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했다. 그 당시 가난한 집에 태어난 대다수의 아이들처럼 말이다. 아빠는 술을 드시면 그런 이야기를 했다. 본인도 공부가 무척 하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그래서 내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너희들은 꼭 공부를 시키겠다는 이야기를 말이다. 정말로 아빠는 그랬다. 봄부터 가을까지, 새벽부터 밤까지 농사를 지었고, 겨울이면 도시로 나가 공사장을 찾아다니며 일을 했다. 일주일에 한 번 겨우 집에 올 때면 아빠는 그동안 먹지 않고 모아두었던 간식들, 컵라면과 빵, 우유들이 들어있는 박스를 가져왔다. 사실 나는 맏이라는 이유로 아빠에게 많이 맞고 자랐다. 배우지 못한 내 부모가 부끄러웠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순간은 잠깐이었고, 우리들을 키우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두 사람의 헌신에 감사해하는 날은 길어갔다. 아마 농사를 짓는 내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방법은 이것이었을 것이다. 농사를 짓듯이 자식들을 키우는 것. 우리가 각자의 꿈을 심을 수 있는 토양이 되어주고, 그것을 키울 수 있는 햇살, 비, 바람이 되어주는 것. 사과꽃을 피울 준비를 하는 아이들에게 복숭아꽃을 피워야 한다고 하지 않는 것. 항상 그곳에 있어주는 것. 무엇보다 올해는 사과가 작고 못생겼더라도 내년에는 더 크고 이쁜 사과가 열릴 수 있다고 믿어주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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