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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단걸 Dec 19. 2020

라디오에 사연을 보낸 적이 있나요?

제가 그 '전설의 오징어 주스' 사연의 주인공입니다.



나는 가수 김동률 씨의 오래된 팬이다. 전람회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의 음악을 좋아한다. 그래서 종종 유튜브로 그의 예전 영상을 찾아 그가 진행했던 라디오를 다시 듣곤 하는데 얼마 전 ‘전설의 오징어 주스’라는 제목의 유튜브를 보게 되었다. 나는 그 제목을 보자마자 어떤 내용인 지 단번에 알아차렸는데 그건 다름 아닌 내가 보낸 사연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뮤랜’이라고 불리던, 김동률 씨가 진행하던 ‘뮤직 아일랜드’를 자주 들었는데 이따금 재미있는 일이 생기면 사연을 보냈다. 내 이름으로만 너무 자주 보내면 왜인지 사연 채택이 안될 것 같아 때로는 친구들 아이디를 빌려 사연을 보내는 꼼수를 쓰기도 했다.


‘전설의 오징어 주스’는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겪었던, 어리바리했던 실수담을 엮어 보낸 것이었는데 당시 게스트로 나왔던 이소은 씨와 DJ김동률 씨가 함께 숨이 넘어가도록 웃느라 감히 ‘전설’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더랬다. (궁금하신 분들은 유튜브에서 검색해보시길!) 어쨌건 내가 보낸 사연들은 높은 확률로 채택이 되었고, 그에 따라 문화상품권, CD 등등 여러 선물도 자주 받았더랬다. 나중에는 선물이 빵빵한 라디오 프로를 찾아가며 사연을 보내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아무래도 유명한 프로는 꽤 괜찮은 선물들이 준비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만 유독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일은 없었을 텐데 나는 재밌는 일을 보거나 겪게 되면 글로 풀어쓰는 것을 좋아했었다.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를 하면서 선물도 받을 수 있다니! 나는 한동안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는 일을 즐겼더랬다.


실은 사연을 보내고 청취자의 입장에서 내 사연이 소개되기를 기다리는 일에서 끝났던 것은 아니었다. 라디오 진행자와 전화연결까지 했던 사람이었다. 후훗. 당시 사귀고 있던 남자 친구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나자 함께 공부하던 여자들과 나 몰래 계속해서 연락을 하고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이야기를 ‘박명수의 두 시의 데이트’에 사연을 보냈는데, 방송국에서 전화가 왔다. 전화연결을 하고 싶다는 것. 나는 청취자이길 원했지 전화연결을 원한 건 아니었다. 그저 내 사연이 소개가 되고 작은 선물을 받고싶었다. 당시 두 시의 데이트에는 ‘우쥬 라이크 썸씽 투 드링크’라는 코너가 있었는데, 실제로 찻잔이 부딪히는 소리와 호로록 차를 마시는 소리, 음~ 스멜이라는 감탄사까지 내뱉으며 청취자와 전화연결을 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코너였다. 작가님은 내 사연을 그 코너에서 소개하고 싶다고 했고 나는 고민 끝에 결국 전화연결을 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그 코너의 선물이 빵빵하기도 했고, 까짓 껏 그다지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작가님의 코치로 나는 호로로록 차를 마시는 소리와 음~ 스멜~이라는 감탄사를 연습했고, 전화연결까지 무사히 마쳤다. 무척 떨었기 때문에 박명수 씨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았다. 그것보다 그날 게시판에는 남자 친구를 욕하는 게시물로 도배가 되었던 것, 남자 친구가 본인을 전국적으로 나쁜 놈으로 만들었다며 허탈해하던 것, 선물로 받게 된 구두 상품권을 남자 친구의 공무원 시험 합격 선물로 주겠다고 하자 간단히 화가 풀렸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는 것과.  


언제부터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보다 언제부터 하루를 마감하며 듣던 라디오를 듣지 않게 되었는지 모른다. 생각해보면 초등학생 때부터 나는 라디오를 즐겨 들었는데 말이다. ‘박소현의 FM데이트’, ‘유희열의 음악도시’, ‘이소라의 음악도시’를 지나 ‘김동률의 뮤직 아일랜드’까지 나의 학창 시절엔 항상 라디오가 있었다. 고3 때였나. 기숙사 학습실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공부를 하던 우리들은 실은 책을 보는 척 이어폰을 꽂고 ‘유희열의 음악도시’ 마지막 방송을 듣고 있었는데, DJ 유희열 씨가 시작부터 엉엉 울자 학습실에서 숨죽이고 라디오를 듣고 있던 친구들 한 두 명씩 훌쩍훌쩍 따라 울기도 했었다.


라디오를 통해 음악 취향이 넓어졌고, 산골동네가 전부이던 내 세상은 라디오를 통해 조금 더 넓어지기도 했다. 불행하다 생각했던 학창 시절의 나를 위로해주었고, 나에게 글쓰기 재능이 아주 조금이나마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기도 했다. 그때의 라디오는. 언제부터인가 나는 ‘손석희의 시선집중’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했고, 라디오를 통해 날씨를 확인하고, 라디오에서 알려준 도로 상황을 주의 깊게 들으며 출근 준비를 했다. 내 고향에서 먼 이곳으로 이사를 오고 난 후엔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들으며 출근 준비를 하고 출근을 하는 것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저 나에게 라디오는 내가 원하는 정보를 알려주는 것 이상이 아니었다. 나는 더 이상 하루를 마감하며 라디오를 듣지 않게 되었다. 그 시간은 넷플릭스로 대체되었고, 더 이상 내가 듣던 음악 이외의 다른 곡을 듣지 않았기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내가 잘 모르는 노래들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최근 다시 라디오를 듣기 시작했다. 코로나로 인해 재택근무를 하게 되면서 너무 적막한 것이 싫어 라디오를 틀어 놓은 것이 그 시작이었다. 보통 낮시간 프로그램을 주로 듣는데 혼자 있지만 혼자 있는 것 같지 않은 느낌이다. 그날그날 날씨에 따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달라져 창밖을 내다보지 않고도 날씨를 가늠할 수 있다는 것, 시계를 보지 않아도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있다는 것, 예전의 내가 보냈던 사연에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누군가의 사연을 들으며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지금 내가 라디오를 듣는 이유이다. 내가 라디오에 사연을 한창 보내던 때에 그런 고민을 한 적이 있었다. 너무 사적인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과 공유해도 괜찮은 걸까? 물론 당시에는 선물에 눈이 멀어 그런 고민의 시간은 짧았다. 이제 나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누군가의 사연을 통해 이 세상에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나와 비슷한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이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에 약간의 위로를 받는다. 이런 이유로 나는 글을 쓰고, 라디오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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