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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단걸 Dec 26. 2020

그래서 성형을 하란 거야?

내가 못생겼다고? 그래도 성형은 안 할 거야.



코로나 19로 재택근무를 하고 있는 나에게 엄마는 거의 하루에 한 번 이상 전화를 한다. 보통 농한기인 겨울에는 마을회관에서 고스톱을 치거나 아빠와 이곳저곳 여행을 하던 엄마는 이 모든 활동을 못하게 되자 심심하다며 나에게 매일 카톡을 보내고 자주 전화를 한다. 심심하다고 하니 나는 보통 엄마와 농담 따먹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데 얼마 전에 나는 엄마에게 장난을 칠 생각으로 말했다.

“엄마는 왜 나를 이렇게 못생기게 낳았어? 엄마가 나를 조금 더 이쁘게 낳았으면 난 벌써 결혼했을걸?” 내 어이없는 말에 엄마가 대답했다.

“그래. 엄마가 미안하다.”

어? 엄마가 이렇게 바로 사과를 하면 어떡해. 아니 어째서 인정하는 거야? 자존심이 상했다. 나는 정말 엄마와 똑같이 생겼는데 어떻게 엄마가 이럴 수 있는 거야? 생각해보면 엄마가 나를 못생겼다고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몇 년 전, 셋째 동생이 성형수술을 하고 나타났다. 그때 당시에 셋째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동생은 부모님께 말하지 않고 혼자 영주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강남으로 가서 성형수술을 하고 얼굴에 붕대를 감고 눈만 내놓은 채로 집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당연히 그 모습을 본 부모님은 기함을 했고 엄마는 나에게 전화를 해서 화를 냈다. 언니가 둘이나 있는데 동생을 말리지도 않고 뭐했냐며 괜히 나를 질타했더랬다. 물론 나와 둘째는 셋째가 성형수술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뜯어말렸지만 그녀의 실행의지에 비하면 우리의 외침은 한낱 메아리에 불과했다. 어느 날 둘째 동생에게 속상함을 토로하던 엄마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성형을 할 거면 첫째가 해야지, 왜 젤 이쁜 셋째가 성형을 하냐 이 말이야! 아휴 내가 진짜 속상해서 못살아.”

둘째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나는 어리둥절했더랬다.

“아니 내가 왜? 내가 어때서? 그러니까 엄마는 나더러 성형을 하라는 거야? 해도 된다는 거야?”


나는 한 번도 성형수술을 생각한 적이 없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예쁘다고 할 수 있는 구석이 하나도 없다. 코도 낮고, 눈도 크지 않고, 쌍꺼풀도 속쌍꺼풀에, 눈썹 숱도 적은 편이다. 그렇지만 썩 나쁜 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특별히 개성이 있지도 않다. 만약 내가 어느 영화 속에 등장한다고 하면 지나는 행인 중 150번쯤으로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그런 얼굴이다. 이 얼굴로 지금껏 살아오면서 득을 본적도, 불편을 겪은 적도 없기에 조금 더 예뻐져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그래서 가끔 가까운 사람들이 왜 성형을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대게 이런 질문은 동생들이 한다.) 당당히 대답한다.

“내가 어때서? 나는 만족하는데?”  

나의 대답에 상대방은 대단한 자기애라며 놀라워하는데 실은 자기애가 아니라 자기만족에 가깝다. 물론 성형수술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나는 하고 싶은 생각이 없을 뿐이다.


2년 전쯤이었던가. 셋째 동생이 또 성형수술을 하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 이번에도 뜯어말렸지만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셋째의 성형 의지를 꺾은 것은 여행이었다. 1년 중 가장 바쁜 1월에 며칠 휴가를 내고 나는 셋째를 데리고 괌으로 여행을 갔다. 셋째의 첫 번째 해외여행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더랬다. 괌을 다녀와서 밀린 업무를 처리하느라 나는 야근을 계속했었지만 그것으로 더 이상 셋째가 성형 이야기를 하지 않아 나도 조금 만족을 했더랬다. 그런데 최근 결혼 준비를 하는 셋째가 다시 그 이야기를 꺼냈다. 결혼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그때 괌만 가지 않았더라도 성형을 했을 것이라며 나를 탓했다. 그때 같이 여행 가줘서 고맙다고, 나랑 와서 너무 재밌다며, 괌에 있는 클럽에서 술 먹고 춤추며 즐거워하던 동생이 이제와 더 예뻐지지 못한 게 내 탓이라니! 하아, 대체 왜 더 예뻐져야 하는 것인지! 지금도 충분히 예쁘다는 뻔한 이야기를 몇 달째 해주고 있다. 휴우.


만약 내가 내 외모로 인해 불편을 겪었거나, 내 외모가 만족스럽지 않았다면 나는 분명 성형수술을 했을 것이다. 부모님의 얼굴을 물려받은 내 얼굴이, 특별히 이쁜 구석이 없어도 뭐가 어떤가. 남자 친구가 나에게 예쁘다고 다정히 말하면, 이 녀석이 무언가 갖고 싶은 게 있는 건가 라는 생각이 먼저 들지만 뭐 어떤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쁘고 잘생겨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나에게 자신의 얼굴을 물려준 엄마조차도 나에게 예쁘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뭐 어때서. 엄마보다 아주 조금 더 예쁘지 않은가. 후훗. 작년이었나. 같은 사무실에서 3년 가까이 일했던, 정년이 얼마 남지 않으신 분이 나에게 “이제 곧 서른이 되는데 어때?”라고 물었다. “저 이제 곧 마흔인데요?”라고 대답했을 때 무척 놀라던 그분을 보면서 그 이야기가 생각났다. 사람이 살아온 지 30년이 지나면 그 사람의 성격이 얼굴에 나타난다는 말. 철없이 살아왔기에, 아직 철이 들지 않았기에 내가 어려 보이는 건가 하는 생각. 그렇다면 나는 계속해서 이렇게 철 없이 살 테다. 예쁘지 않으면 어때, 내 나이로 보이지 않으면 어떤가. 내가 철이 없어서, 마흔을 코 앞에 둔 내 얼굴에 여전히 재치와 장난기가 남아있어 누군가를 즐겁게 해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은 게 아닌가. 아,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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