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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단걸 Jan 21. 2021

1인 가구의 보호자

언제까지나 내게는 부모님이 필요해.



입원을 하고 부모님께서 내 집으로 돌아가고 난 후, 환자복을 갈아입고 배정받은 침대에 누워있으려니 왈칵 무서워졌다. 이전까지는 되도록 수술을 받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서 별 느낌이 없었는데, 이렇게 혼자 병실에 누워있으려니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있었다. 외면했던 일이 현실이 되자 나는 무서워졌다. 엄마에게 잘 도착했냐는 문자와, 경비실에서 차량 등록을 잘했냐는 문자를 보내고 난 후, 

‘너무 무서워 ㅠ 혼자 있으니까’

라고 문자를 쓰고 있는데 엄마에게서 문자가 왔다. 

‘겁내지 마라’ 

왈칵 눈물이 났다. 겁 많은 딸이 지금쯤 무서워서 오들 오들 떨고 있을 것이란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겁내지 마라’이 한 문장에 갑자기 서러워졌다. 지금 부모님이 내 옆에 있었으면, 옆에 앉아서 별 시답지 않은 이야기라도 했으면 하는 간절함이 생겼다. 


수술을 위해 정맥주사 바늘을 꽂는데 주삿바늘이 굵어서인지, 내 혈관이 잘 보이지 않아서인지 두 번이나 시도를 했지만 혈관이 터져버렸고, 손등에서 겨우 혈관을 찾아서 주삿바늘을 꽂을 수 있었다. 엄마에게 대일밴드가 두 개 붙여진 내 팔 사진을 보내자 엄마는 이렇게 회답했다.

‘에고 많이 부었어’

흠. 엄마는 부었다고 믿고 싶겠지만 실은 부은 게 아니라 전부 내 살인데. 이래서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이쁘다고 한다는 말이 있는 건가. 그 후로도 피검사를 위해 피를 뽑을 때도 혈관을 찾지 못해서 내 팔 여기저기에 주삿바늘이 꼽혔다가 빠진 자국이 남겨졌고, 퇴원하고 혼자서 씻지 못하는 내 몸 구석구석을 씻겨주던 엄마는 수많은 바늘 자국과 멍든 자국을 보고 극대노하고 말았다. 

“다음부터는 내가 간호사들한테 말할 거야. 사람 팔다리를 우에 이래 만들어 놓냐 말이야! 큰 병원인데 주삿바늘 제대로 꽂는 사람이 없나!”

힝. 엄마. 난 이제부턴 건강관리 잘해서 입원과 수술은 두 번 다시 받고 싶지 않단 말이야. ‘다음부터’라는 표현은 하지 말아 줘.   


무사히 수술에서 깨어나고 난 후, 나의 첫마디는 “아파. 너무 아파”였다. 회복실에서 병실로 올라가는 와중에도 엄마한테 계속 말했다. “엄마. 나 너무 아파” 눈물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너무 아팠다. 병실의 내 침대에 누워 연신 심호흡을 하며 마취로 쪼그라든 폐를 펴는 와중에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수술은 잘 됐다던데 좀 어떻노?”

“아빠, 나 너무 아파. 진짜 아파”

십 대 이후로 아빠에게 반말로 응석을 부려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래. 수술이 금방 끝났으니 지금은 아플끼라.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끼라.”

아빠의 다정한 위로에 눈물이 났다.

“근데 아빠, 나 정말 아파. 이렇게 아플 줄은 몰랐어”

“오냐. 좀 더 있으면 개안아진다.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 약 잘 먹고 해라이”

뒤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이날 아빠는 새벽에 엄마를 병원에 데려다주고 급히 시골로 내려가느라 내가 수술을 받는 동안 운전 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수술은 들어갔냐. 언제 나오냐. 아직도 수술 중이냐. 언제 끝난다고 하냐’며 계속 물었다고 했다. 마흔을 코 앞에 둔, 나이 든 딸이 아프다고 응석을 부리는 모습에 부모님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일어나 앉기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수술 당일에, 마침내 일어나 앉을 수 있게 되었던 그다음 날 아침, 소변줄을 제거하고 내 발로 걸어서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수 있기를 바랐던 그 날, 진짜 소변줄을 제거했을 때 어찌나 기뻤는지 모른다. 4시간 안에 소변을 보지 못하면 강제로 소변을 빼내야 한다는 말에, 한 시간 넘게 화장실에 앉아있으면서 ‘제발, 제발, 할 수 있다. 조금만 힘을 내자’며 나를 독려해도 목표치만큼 소변이 나오지 않아 간호사에게 한 시간만 더 달라며 사정하면서도 나는 기뻤다. 내 발로 걸어서 화장실을 갈 수 있고, 침대 난간을 잡고서라도 내 몸을 일으킬 수 있음에 말이다. 어쨌든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회복기간을 거쳐서 마침내 나는 퇴원했다. 수술 부위에 물이 들어가면 안 되기에, 방수 패드를 붙이고도 샤워를 할 수 없다는 이야기에 잠시 멍해지긴 했지만 말이다. 집에 오자마자 엄마는 나를 씻겨주겠다고 했다. 물수건으로 살살 닦으면 된다고 나를 욕실로 잡아끌었다. 


엄마랑 같이 대중목욕탕도 가긴 하지만 엄마보다 몸집이 커진 나를 엄마가 씻겨 준 적은 어릴 때를 제외하곤 없었다. 나는 약간 부끄러워졌다.  

“엄마, 내가 딸이어서 이렇게 씻겨주는 거지?”

“그래. 딸이니까 이렇게 해주지”

“근데 엄마, 나는 엄마나 아빠가 나이 들어서 이렇게 거동을 못할 때, 나는 못 씻겨줄 거 같아.”

“안 씻겨줘도 된다. 나는 아빠가 씻겨줄 거고, 너그 아빠가 거동 못하면 내가 씻겨주면 된다. 너그한테 그런 걱정 안 하게 할 테니 그런 생각 안 해도 된다.”

“말하고 나니까 내가 참 못된 딸년 같다. 히히”

“부모는 자식 씻겨주는 게 아무 일도 아닌데, 자식은 부모를 씻기는 게 힘들지. 내 부모라도 그건 쉽지 않은 거야. 우리는 우리가 알아서 씻겨주고 할 거니까 너는 신경 안 써도 돼”

민망해진 내가 말했다. 

“엄마, 나 다시 애기가 된 거 같아”

내 말에 엄마는 웃었다. 아마 그녀는 갓 태어난 나를, 누워만 있던 나를, 겨우 기어 다니던 나를,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던 나를,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어린 시절의 나를 수백 번, 수천번은 씻겨주었던 그때를 생각했을 것이다. 겨우 2.3킬로로 그녀의 몸에서 태어난 내가, 어느새 엄마보다도 더 커버린 내가, 엄마도 낯설었을 텐데 엄마는 내 몸 구석구석을 조심조심 씻겨주었다. 

“엄마, 나 코딱지 나왔다. 힝” 

검지 손가락에 올려진 내 코딱지를 보며 엄마에게 말했다.

“하이고, 드러라.” 

엄마는 기꺼이 내 코딱지를 엄마 손으로 닦아주었다. 

머리를 감겨주고, 내 몸에 바디로션을 꼼꼼히 발라주면서도 엄마는 미안해했다. 내가 전부 회복할 때까지 옆에 있어주지 못하고 제사 때문에 바로 내려가야 하는 상황에 대해서 말이다. 


수술동의서의 보호자란에 엄마의 이름을 쓰면서 나는 안심이 되었다. 나를 낳아주고 키워준 내 부모님이 아직도 나의 보호자라는 사실에 설명하기 힘든 안도감을 느꼈는데, 수술실에 들어가면서도 생각했다. 수술실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엄마가 있으니 외롭지 않다는 생각. 수술은 무섭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나의 보호자가 있다는 사실. 부모님께서 집으로 가고 난 후 괜히 나 때문에 이렇게 멀리까지 와주고, 고생시켜서 미안하다고 했더니 부모님은 무슨 소리냐며, 우리가 안 오면 누가 오냐고 몸조리나 잘하라고 했다. 생각해보면 부모님께 무언가를 부탁한 적이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훌쩍 커버린 우리들은 이제 부모님의 도움이 없어도 사는데 문제가 없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부모님은 우리의 아주 사소한 부탁에도 기뻐하며 기꺼이 도와줄 수 있는 여유가 있음에도 우리는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수술받고 입원하는 동안 보호자로 와 달라는 요청에 두 사람은 기꺼이 달려왔는지 모르겠다. 내가 입원해있는 동안 아침, 저녁으로 내 강아지들의 밥을 챙겨주고, 내 공간을 청소해주고, 내가 먹을 밥과 국을 준비해놓으면서 엄마는 조금은 기뻤는지 모른다. 아직 내 자식들이 나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 

물론 내가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하자 전화로 온갖 잔소리를 퍼붓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이고, 아무리 혼자 산다고 해도 구석구석 깨끗하게 해 놓고 살아야지. 음식물 쓰레기 통하고, 싱크대 개수 대하고, 베란다 구석하고 마구 다 솔로 문질러 가지고 닦아야제. 하이고 야야. 이래 가지고 어느 놈이 니한테 장가 오노? 을매나 드럽든동.” 

흠.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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