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단걸 Jan 25. 2021

언제든, 언젠가는 다시 아리산!

오래전 아리산 여행기를 지금 다시. 3




아리산에 도착한 나는 자이 역에서 호객 할머니를 통해 예약한 호텔을 찾았다. 4만 원짜리 호텔이라 기대는 크게 하지 않았지만 어쨌건 할머니가 보여준 탬플릿에 있는 사진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나는 아리산 호텔이 목적이 아니라 아리산에서 보는 일출이 목적이었기에 화가 나지 않았다. 실은 너무 많은 일들이 하루에 물밀듯이 밀어닥쳤기 때문에 화를 낼 힘조차 없었다. 아침에 숙소에서 먹은 조식이 마지막이었으므로 나는 간단히 저녁을 먹으러 호텔 밖으로 나섰다. 역 주변 편의점에서 컵라면으로 대충 끼니를 해결한 후 본격적으로 아리산 역 주변을 산책했다. 아리산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 대다수의 관광객들은 아리산 역에서 기차를 타고 주산까지 오른다. 아침잠이 많은 나는 주산까지는 트레킹이 아닌 기차를 이용하기로 했다. 일출을 보고 난 후, 가벼운 마음으로 걸어서 산을 내려오기로 했기에 우선 예매라도 해둘까 해서 역 창구로 갔더니 이미 창구는 닫혀있었다. 비어있는 역사 2층 전망대에 올라 오늘 내가 택시를 타고, 중간에 버스를 갈아타고 올라왔던 아리산을 내려다보았다. 하늘은 잔뜩 흐렸지만 아무렴 좋았다. 이 고단한 과정을 통해 지금 내가 이곳에 올라있다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아리산은 고산 차로도 유명하다. 따라서 차 시음을 해볼까 해서 역사 앞에 있는 상가로 발걸음을 돌렸다. 문이 열려있는 한 가게에 들어가니 인상 좋은 아저씨가 유창한 영어로 아리산 차를 홍보했다.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앞에 앉으니 이내 시음용 차를 우렸다. 찻잔에 담긴 숟가락을 내게 건네주면서 향을 한번 맡아보라고 했다. 꽃향기와 과일향이 깊은 차향과 어우러졌다. 나의 똥그래진 눈을 보더니 아저씨는 이게 바로 아리산 고산 차라며 어딜 가도 이런 차는 만나지 못할 것이라 장담했다. 신이 난 아저씨는 차를 7번을 우려내 내게 권했다. 나는 7번 차를 마셨다. 7번을 우려도 우려낸 차의 색은 전혀 옅어지지 않았다. 만족하는 내 표정을 보더니 아저씨는 우롱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소변이 급한데, 아저씨는 이번에도 우롱차를 7번을 우려 나에게 권했다. 나는 결과적으로 14번 차를 마셨다. 다리가 달달 떨려오는데 아저씨의 설명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아저씨는 나에게 아리산 고산 차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느냐며 우려낸 찻잎을 하나 둘 꺼내더니 이렇게 줄기 하나에 이파리가 세장이 붙어있는 게 아리산 고산 차라며 천천히 찻잎마다 이파리가 세장이 붙어있는지 확인시켜주었다. 어디서든 속지 말라며 이미 하루에 두 번이나 사기를 당한 나를 알아본 것처럼 신신당부했다. 화장실이 급했던 나는, 게다가 어리숙했던 나는, 총 14잔의 차를 마시고, 직장동료들과 가족들에게 선물한 차를 10만 원어치나 구입하고야 말았다.


다음날 아침, 새벽 4시 30분 출발인 주산행 기차 시간을 30분 남겨두고 일어났다. 창밖으로 빗소리가 들렸다. 일출을 보러 주산으로 오르려는 내게 가장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창문을 열어보니 비 때문인지, 높은 곳에 올랐기 때문인지 생각보다 기온이 낮았다. 나는 내가 가진 옷 중에 가장 두꺼운 옷을 다 껴입었다. 편도 티켓을 끊고 주산행 기차에 올랐다. 갑작스러운 비 때문인지 기차에 승객이 많지 않았다. 기차의 구석에 앉은 나는 산속의 날씨는 시시각각 변하기 마련이니까 주산에 오르면, 이 비구름이 다 걷히고 일출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나조차도 힘없는 희망을 기대했더랬다. 나의 희망과는 다르게 주산에 도착하니 거센 비바람이 내 얼굴을 세차게 때렸고, 비닐 비옷은 연신 내 허벅지와 종아리에 들러붙어 한걸음조차 떼기가 쉽지 않았다. 이번 대만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것 중의 하나인, 아리산에서의 일출은 포기해야 했다. 아무리 기다려봤자 해는커녕 하늘도 보기 어려울 것이란 판단에 나는 간단히 포기했다. 다음에 또 오면 되니까. 택시를 타고 중간에 버스를 갈아타고 어렵사리 올라왔지만, 새벽에 일어나 기차를 타고 주산까지 올라와 일출은 못 봤지만, 뭐 어때. 다음에 또 오면 될 것을. 쿨한 여행자인 나는 쿨하게 하산했다. 주변에 있던 상인분들께 내려가는 길을 물어 그들이 알려준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열 걸음쯤 걸었을까. 기차가 출발한다는 사인을 보냈다. 나는 다시 트레킹을 간단히 포기해버렸다. 이 비바람을 뚫고 산을 내려갈 자신이 없었다. 또다시 편도 티켓을 구매하고 기차에 올랐다. 


결국 나는 중간에 있는 자오핑 역에서 내려 트레킹을 하기로 했다. 내려오는 길은 무척 예뻤다. 시원스레 뻗은 나무들 사이로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설명하기 힘든 치유의 힘이 느껴졌다. 머릿속을 비운채로 걷고 또 걷다 보니 어느새 숙소에 도착했다. 씻고 체크아웃을 하고 로비로 내려왔다. 어제 체크인하면서 미니버스를 예약해두었기 때문에 나는 로비에 앉아 미니 버스를 기다렸다. 주산행 기차를 함께 탔던 중국인들이 하나둘씩 로비로 내려왔다. 우리는 다 함께 봉고를 타고 아리산을 내려왔다. 어제 이 산을 오를 때는 한껏 긴장해서 또 한편으로 설레는 마음으로 올랐는데 내려가는 길은 무척 평안했다. 여전히 산길은 꼬불꼬불한 이차선이었고, 옆은 낭떠러지였지만 나는 이 산 깊은 곳을 걸었고, 고산 차도 14잔이나 마셨으니 왜인지 아리산과 조금은 친해진 기분이었다. 나를 태운 봉고는, 어제 내가 택시를 탔던 그 자이 역 앞에 내려주었다. 


봉고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어제 그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할머니가 나를 향해 뛰어오셨다. 환하게 웃으며 손으로 연신 가슴을 치며 빠른 중국어로 이야기를 했다. 아마 자기를 기억하냐는 것 같았다. 대강 눈치로 때려 맞추고 나도 환하게 웃으며 한국어로 말했다.

“아휴, 할머니 엄청 부지런하시네요!” 

여전히 할머니는 나에게 중국어로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중간중간 ‘자이’, ‘아리산’이라는 단어가 들렸다. 나는 큰소리로 “아리산!” 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니 할머니가 박장대소를 한다. 나는 오늘 기차가 아니라 버스로 타이베이로 돌아갈 예정이므로 할머니에게 다시 묻는다.

“타이베이! 버스!” 

내가 뱉은 두 단어를 들은 할머니는 내 팔을 이끌고 버스정류장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함께 걸어가다 보니 어제 나를 태워준 택시기사님도 보인다. 할머니가 나를 가리키며 기사님께 중국말로 뭐라고 이야기하시길래 나는 또 “아리산!” 하며 엄지를 치켜세우니 두 분 모두 박장대소를 하는 게 아닌가! 배낭이 무거운 줄도 모르고 나도 그들과 함께 웃어버렸다. 






매거진의 이전글 1인 가구의 보호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