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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정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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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a Lee May 22. 2020

마감 끝난 다음날

정병일기 6

눈을 뜨니 정오였다. 핸드폰을 집어 드는데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8시쯤이었나 '이렇게 누워 있어도 되나' 흠칫 놀랐다가 어제 마감을 쳐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다시 눈을 감았나. 잠시 감았다 뜬 게 벌써 4시간이다. 아직도 베개에서 머리를 떼내기가 힘들었다. 오늘만은 어떤 바보 같은 욕망에도 저항하지 않기로 했다. 누운 채로 인터넷 기사랑 SNS에 어지럽게 흩날리는 남들 이야기를 봤다. 어젯밤 드라마 내용을 글로 정독하고 열애설이 나서 억울해하는 연예인이 열심히 항변하는 것도 봤다. 아는 사람 인스타그램에 밥해먹은 거 올라온 사진도 봤고 모르는 사람 인스타그램에 개가 안경 쓰고 TV 보는 것도 봤다.


마감이 지나갔다, 그것도 어제. 오늘만은 아무 죄책감 없이 뒹굴어도 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정병으로서도 새삼 미칠 것 같았다. 도대체 오늘 하루 무엇을 하고 지내야 1분 1초 핥듯이 꼼꼼하게 즐겼다고 소문이 날까. 도대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을 최고로 잘 보내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1분 1초를 낭비하지 않고 즐겨볼 것인가, 를 고민하는데 2시간을 낭비했다. 그런데 오늘은 그것마저 그래도 되는 것이다.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당장 마스크를 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손소독제를 짜주며 "부럽겠지만 나는 오늘 하루종일 이짓만 하고 있어도 된다"고 속삭이고 싶었다.


책상 위에 종이랑 휴지랑 몬스터 깡통이랑 커피우유 우유팩까지 섞여서 뒹굴었지만 보란듯이 내버려 두기로 했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 머뭇거리며 새벽에 몬스터 캔을 따던 시간, 뻑뻑한 눈에 화한 느낌이 나는 안약을 넣던 시간, 유튜브에서 뇌파를 각성시켜서 졸음을 쫓아준다던 음악을 틀던 시간, 막바지에는 몬스터조차 지쳐서 차라리 커피우유를 마시던 시간이 거기 있었다. 이 잔해조차도 오늘의 텅 빈 시간을 더 돋보이게 해줄 것이었다. 오랫동안 자고 일어난 뒤끝의 싫지 않은 두통을 느끼며 편의점으로 향했다. 4개에 만원 하는 싸구려 와인 작은 병을 팔이 떨어져라 잔뜩 안고 돌아오는 길. 밥, 약, 술 이 세 가지 이외에 오늘은 어떤 쓸모 있는 생각도 절대로 하지 말아야지. 마스크 안에서 숨이 가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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