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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정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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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a Lee Apr 13. 2020

코로나 시대의 정병

정병일기 5 - 남들이 다 나같이 지내겠다는데

오늘부로 오른쪽 엄지손톱 옆의 굳은살이 완전히 다 뜯겨나갔다. 군데군데 표피에서 한층만 내려간 곳도 있고 2,3층 내려간 곳도 있고 지하실까지 파내려 가서 분홍색 살코기가 보이는 곳도 있다. 살에 새겨진 주름이나 지문은 두꺼운 굳은살 두세 겹쯤 들어내도 연한 속살에 그대로 남아있다. 그게 신기해서 발골을 계속했다. 이대로만 성실히 뜯어나간다면 1,2주 지나지 않아 뼈가 보일 것이었다.

침대에 누워서 휴대폰으로 오른손을 그린다


지난 설날 연휴를 기점으로 외출을 줄였다. 원래부터 밖에 나가는 걸 꺼리던 정병이었기 때문에 이러나저러나 상관없었다. 그전에도 먹고사느라 주기적으로 얼굴을 비추어야 하는 자리야 나도 가끔 있었다. 그럴 때면 언제나 약속시간에 간당간당할 때까지 남은 의지를 쥐어짜서 모은 다음 적절한 순간을 기다려야 했다. 눈금이 차는 순간 천천히 조심스럽게 윗몸부터 방구석에서 떼내는 것이다. 이따위로 살아왔으니 남들이 이제 나 하는 대로 방구석에서 지내보겠다는데 선배로서 쑥스럽지만 싫을 리 없었다. 나 이젠 주류가 된 거야.


바야흐로 우리 사회의 당당한 주류가 되신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텔레비전에서는 하루 종일 '우리'의 기분을 걱정하며 어떤지 물어주고 별별 조언을 다해주고 놀아주고 아이디어를 주고 재롱도 부려주고 울어도 주었다. 여태 내가 생각해낸 거라곤 혼자 하루 종일 방바닥이 거대한 찜통이고 내가 큰 만두여서 안에 있는 만두소가 다 익을 때까지 딱 붙어있는 놀이가 전부였는데. 연일 쏟아지는 현란한 아이디어에 황송하면서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메인스트림의 삶이란 이처럼 피곤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가장 최신 흐름에 발맞추어 나가는 주류로서 의연히 감내하기로 했다.


메인스트림의 삶이 한 달간 이어지면서 나는 오른손 엄지를 뜯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에서는 아직도 내 안부를 궁금해하고 이렇게 해봐라 저렇게 해봐라 어지러웠다. 이제 그만 관심의 대상에서 벗어나 다시 아무도 모르게 만두소를 익히기만 하면 되는 만두놀이로 돌아가고 싶었다. 원래도 조금만 불안하면 손끝 굳은살을 뜯었는데 이번에는 마감 전날에 키보드를 치기 어려울 정도였다. 마감이 지나도 여전히 나는 '우리'였고 우리 이야기가 신문에 오르내렸다. 엄지에서는 피가 나는 날이 많았고 손소독제를 약간 발라 소독할 때도 있었다.


두 달이 지나자 이젠 우리 이야기가 외국어로도 나오기 시작했다. 한국사회의 주류를 넘어서 이젠 세계적으로도 내 라이프스타일이 주류가 되었다. 지구인이란 지구인들은 다 내가 하던 대로 방구석에 처박히겠다고 했다. CNN에서도 내 라이프스타일이 대세가 되어 우리 쪽 문제만 걱정해주고 이것저것 가르쳐주고 놀아주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던 사람들도, 싫어하던 사람들도, 모두 나처럼 고립되겠다 했다.


모두가 이 놀이에 동참한다 하니 역시 사회성이 없는 나로서는 어쩐지 어색하고 불편해졌다. 아무도 집구석에 처박히는 것 따위 함께하지 않고 모두 나가 놀던 때가 차라리 좋았다. 나 혼자만 이 구역 유일한 정병으로 만두 찜통에 들어앉아 있던 때평온이 그리웠다. 오늘 다시 한번 가만히 누워서 베란다 밖의 구름이 움직이는 것을 지켜본다. 해야 할 일도 많고 곧 약도 먹어야 하지만 만두소를 다 익혀야 일어날 수 있다. 잠시 모두와 함께 일상을 같이 한건 색다른 즐거움이었지만, 이제 어서 상황이 나아져서 나 혼자만 평화롭게 처박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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