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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정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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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a Lee Jun 05. 2020

효율적인 눈물생활

정병일기 7

여느때처럼 마감을 마치고 부들부들 떨며 편의점표 싸구려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매번 새벽 5시쯤에 이번만큼은 과장하는게 아니고 정말로 다 틀렸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번주에도 별별 비극적인 생각 다 하고 나서 언제나처럼 정오에 편의점에 갔던 것이다. 이번에는 달달한 걸 골라와서 그런가 술술 잘도 넘어갔다. 유튜브로 릴랙스할때 듣는다는 '숲속소리와 피아노' 같은 영상도 잔뜩 골라서 틀어놨다. 아직 점심때이고 좀 마신다 해도 저녁쯤에는 멀쩡해져서 정상인처럼 하루를 마감할 수 있을 것이다. 어플에선 미세먼지 수치가 아직 좋지는 않다고 걱정했지만 좀 완벽하지 않은 공기조차 아쉬워서 질식할 지경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이면 닫으면 되지, 창문을 살짝 열었다. 책상 위에 발을 올리고 와인병에 입을 댔다. 조금 있으니까 바깥바람이 귓볼에 닿았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는데


눈물이 났다. 항상 이런 식이다. 이제 살만해졌다는 거겠지. 뱃속이 뜨뜻해지고 긴장이 풀어지니까 눈에서 물이 쏟아졌다. 내가 하든 남이 하든 질질 짜는 술주정은 별로인데, 마감 끝난 날에는 바보같은 욕망에도 몸을 맡기는 것이 순리. 잠시 시간을 써서 물을 다 빼내기로 했다. 수면부족으로 멍한 머릿속에서 단편적인 이미지들이 스쳐 지나갔다. 오늘 새벽에 식은 땀을 흘리며 2분에 한번씩 의자에 고쳐 앉았던 장면, 지난주에 오랜만에 나갔던 시내 풍경, 작년에 만났는데 이제는 쉽게 만날 수 없는 사람들, 그리고 그리고 몇년 전까지는 너무 당연하게 함께 있었는데 이제는 영영 못본다고들 하는 사람.


평소보다 오래 물이 줄줄 흘러내렸지만 저항하지 않고 닦지도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물리적으로 이정도 눈물이 기어나오는건 정말 오랜만이네. 눈물은 카타르시스를 주는 효과가 있는 방어기제라는데 이 시점에서 눈물을 좀 빼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었다. 생각하면 나는 이런 종류의 슬픔마저도 다음 주 작업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 이용하고 있는걸까? 적절한 시점에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적정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슬픔착취하고 있는걸까? 효율적으로 물을 빼내는 전기자극을 주는데에 주기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의 얼굴이 있는 걸까? 내가 이 사람의 얼굴을 떠올린 것은 최대한 빨리 눈물과 카타르시스를 얻기 위한 음료, 아니 오래 들고 마시지 않아도 삼키기만 하면 바로 효과를 보는 보조제 알약이었던 걸까? 지금 이 생각조차 죄책감을 희석하기 위해 외우는 매뉴얼인걸까?


벌써 세번째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이 화창한 날에 나는 전기를 써가며 잡음이 조금씩 섞여서 나는 빗소리를 듣고 있다. 빗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편해지고, 난로소리만 들어도 아늑하다던데 두개를 합쳐놨다니 과연 릴랙스계의 끝판왕이 되어야 할거다. 와인은 작은 병이라서 금방 끝났다. 오리엔테이션에서 선배들 당황스럽게 하는 대학교 새내기도 아니고, 혼자서 이정도 취한건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지구에 무해한 일일 것이다. 눈물이 말라서 뺨도 눈도 뻑뻑하고, 딱 예상한 정도로 나쁘지 않은 카타르시스. 오늘 마감을 하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건 이해하지만 한장만 살짝 해놓으면 다음주에 10분은 더 잘수 있을거야. 수분이 다 빠져나가서 버석버석한 눈으로 오래오래 물을 마셨다. 낡은 물을 많이 빼주고 또 새 물을 많이 넣어줬으니 당분간은 괜찮을 것이다. 그러게 울 때는 열심히 눈물을 짜내고, 그러고 나서 꼭 수분보충을 해줘야 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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