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낯선 언어의 틈새에서 비로소 불린 나의 이름

아비르의 이중생활

by MIA

아이의 국제학교 하굣길, 쏟아지는 영어의 홍수 속에서 나는 늘 '누구의 엄마' 혹은 '누구의 아내'라는 투명한 명찰을 달고 있었다. 타지에서의 삶은 늘 공동체라는 이름의 울타리 안에 나를 가두곤 했다. 골프를 치거나 영어를 배우러 가도, 그곳엔 늘 비슷한 고민을 공유하는 '우리'가 있었다. 고마운 인연들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럴수록 나는 '나 홀로' 존재할 수 있는 빈틈을 갈망했다.


그래서였다. 아랍어라는, 도무지 읽을 수조차 없는 낯선 기호들에 마음을 뺏긴 것은.

사실 아랍어가 절실했다기보다,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척박한 공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구글맵을 뒤져 찾아간 학원은 카이로의 어느 낡은 건물에 있었다. "여기가 맞나?" 싶을 만큼 허름한 외관. 문을 열고 들어가니 무심한 표정의 젊은 직원이 왓츠앱 번호 하나를 툭 내밀었다. 며칠을 망설이다 보낸 메시지 끝에, 나는 드디어 보름 만에 그 낯선 교실의 문을 열 수 있었다.


0점의 공포보다 달콤했던 '학생'이라는 신분

그곳에는 나이 어린 유럽 청년과 러시아에서 온 주부들이 섞여 있었다. 30대 초반, 누군가에겐 한창인 나이였겠지만 '경단녀'라는 이름표가 무겁게 느껴지던 내게 그 교실은 묘한 해방감을 주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그곳에선 아무도 나를 '누구의 와이프'로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는 그저 서툰 발음으로 아랍어 알파벳을 따라 쓰는 '아비르'였고, 매주 쪽지시험 점수에 일희일비하는 서른셋의 학생이었다. 이집트에 온 후 이토록 무언가에 몰입해 본 적이 있었던가.

꼬불꼬불한 글자들과 씨름하며 밤을 지새우던 시간들. 남들이 보기엔 별것 아닌 레벨업 테스트였지만, 나는 그 시험에서 1등을 차지했다.

"그래, 나도 여전히 하면 되는 사람이었지."

단순히 성적이 좋아서 기뻤던 게 아니다. 멈춰버린 줄 알았던 나의 엔진이 여전히 뜨겁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 작은 성취가 증명해 주었기 때문이다. 1등이라는 숫자는 나를 짓누르던 자격지심을 걷어내고, 무너졌던 자존감의 기둥을 다시 세워주었다.


멈춤이 아닌, 나를 재발견하는 시간

경력 단절의 시간은 결코 비어있는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새로운 언어를 배우기 위해 잠시 침묵하는 시간과 같다. 아랍어 학원의 그 낡은 책상 위에서 내가 배운 건 언어가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었다.

낯선 땅, 낡은 교실에서의 그 작은 승리가 없었다면 아마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제 안다. 내 인생의 페이지는 타인이 적어주는 직함이 아니라, 내가 직접 꾹꾹 눌러 쓴 서툰 문장들로 채워진다는 것을.


나일강.jpg


작가의 이전글5화.'주재원 와이프'라는 가장 화려한 감옥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