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머문 말들
작가 『김랄라』
내겐 명언충(忠) 기질이 있다. 힘들 때 명언들을 읽으며 다시 일어설 힘을 찾기도 하고, <논어>나 <도덕경> 읽는 것을 좋아한다. 최근 열고 닫을 수 있는 마스크 디자인을 특허 출원한 동방신기의 유노윤호가 한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가장 해로운 벌레(忠)는 ‘대충(忠)’이다”라고 했을 때 모두가 유머로 받아들였지만 난 크게 감명을 받기도 했다. 순전히 나의 대중적이지 않은 남다른 감수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나는 말의 힘을 믿는다. 그렇다고 항상 주옥같은 말만 내뱉는 건 아니다. 내가 하는 말들 중에 80%는 허황되고 갑작스럽다. 또 가끔은 억지로 내는 트림 소리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공백을 채우기 위해 아무 말이나 꺼내 아무렇게나 내뱉을 때 그렇게 느낀다. “말이 씨가 된다”라는 말을 믿고 입 밖으로 뱉으면 뭐든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운동이라든가 공부 계획을 주변 사람들에게 떠들고 다닌 적도 많다. 물론 그 계획들은 오래가지 않았다. 딱히 말을 청산유수 잘하거나 말로 돈을 버는 직업을 갖고 싶은 건 아니지만 불필요한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20년 넘게 살면서 셀 수도 없이 많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그 사람들의 수보다 훨씬 더 많은 말들을 들었다. 그중에는 기억에 남는 말들도 있었고 상처가 된 말도 있었으며 나를 변화시킨 말들도 있었다. 몇 가지 기억에 남았던 말들을 꺼내보자.
랄라가 알면 모두가 아는 거야.
때로는 상처로 박힌 말이 나를 성장시켜주기도 한다. 6학년 겨울방학, 학원 영어 선생님에게 들었던 말이다. 때는 어느 보강 시간, 선생님은 내게 문장을 읽어보라고 시켰다. 나는 자신 있게 “아이 돈 카레”라고 외쳤고, 선생님과 반 친구들은 듣자마자 배꼽을 잡고 쓰러졌다. 원래 문장은 “I don’t care”였고 “아이 돈 케어”라고 읽어야 맞는 문장이었다. 그땐 정말 부끄러워서 어디로든 숨고 싶었다. 다음 날에도 영어 수업은 계속됐고 반 친구들과 함께 연습 문제를 풀던 중에 선생님은 내게 또 한 번 문제를 풀어보라고 시켰다. 다행히 익숙한 문제였고 자신 있게 정답을 맞힐 수 있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칭찬 대신 내게 이렇게 말했다. “랄라가 알면 모두 아는 거니까 다른 친구를 시킬 필요는 없겠다.” 고마워요. 선생님 덕분에 오기로라도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었어요.
네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죄송하다고 말하지 마.
습관처럼 내뱉은 말이 나의 가치를 낮게 만들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 준 말이다. 전에 다니던 회사 상사에게 들었다. 사회초년생이 첫 직장에 가서 가장 많이 하는 소리가 “넵” 또는 “죄송합니다”라고 한다. 작은 신문사에서 첫 사회생활을 하게 된 나 역시 누구와 약속이라도 한 듯 넵무새*가 되어 있었고, 하루에 ‘죄송합니다’를 대략 10번씩은 뱉었던 것 같다. 어느 날 사무실에서 거래처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또 ‘죄송합니다’를 반복해서 말하고 있었나 보다. 가만히 통화를 듣고 있던 국장은 나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죄송하다고 하는 건 오히려 상대방에게 너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일이다.” 사회초년생에게 필요한 고맙고도 따끔한 조언이었다. 습관처럼 내뱉는 사과와 약속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넵무새: '넵'과 '앵무새'의 합성어로, 모든 대답을 '넵'으로 반복하는 직장인을 이르는 신조어. (출처 네이버 오픈사전)
여자는 2종 따세요.
대한민국, 90년대생, 여자로 살면서 많이 들었던 말 중 하나는 “여자는~”이라고 시작되는 말이다. 심지어 운전면허를 따려고 간 운전 학원에서도 그 말을 들었다. 벌써 3년도 더 된 이야기이다.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 학원에 가서 상담을 받고 있었다. 나는 학원 상담사에게 “요즘 1종을 모는 경우가 많냐”라고 물었다. 상담사는 대뜸 “여자는 2종을 취득하는 게 낫다”라는 답변을 했다. 상담사는 40대 중후반의 남자였다. 이보다 더한 동문서답이 또 있을까. 나는 이유를 물었지만, 뻔하고도 뻔한 대답이 돌아왔다. “여자들은 아무래도 위험하죠.”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 상담사에게 내 질문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이나 한 것이냐고 따져 묻고 싶다. 그날 나는 2종 보통 면허를 딸 계획이었으나 그 자리에서 1종 보통으로 변경했고, 단 한 번에 면허 시험에 붙었다. 다시 한번 나는 말의 힘을 믿는다. 말 한마디로 한 사람을 구원할 수도 있고 반대로 한 사람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말들 속에서 상처 받고 성장하고 변화해 왔을까. 그동안 들었던 말들 중에는 내게 꼭 필요한 말들도 있었고 누가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흘러가는 말들도 많았다. 상대방에게 그 순간 꼭 필요한 말을 하는 건 분명 어려운 일이다. 나는 좋은 의도로 말했으나 상대가 기분 나쁘게 받아들인 경우도 많았다. 말을 내뱉기 전 상대에게 상처가 되진 않을까 생각하다가 도로 삼킨 경험도 자주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누군가의 마음속에 좋은 기억으로 머물 수 있는 말을 하고 싶다. 구원까지는 아니지만 도움은 될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