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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아와 랄라 Jun 29. 2020

아무도 사과하지 않아 나는 계속 분노하려 한다

용서할 마음은 있지만 용서할 대상이 없는 아이러니

작가 『김미아』


분노하다 상처 받은 마음의 외침. 대부분 본인을 포함한 가장 가까운 상대에게 향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진정한 상대는 따로 있다.


성적 학대를 당한 적이 있다. 초경이 오기 전이었다. 그 날 이후, 나는 아주 어린아이 같다가도, 할머니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감정을 다 빼앗겨 버린 기분이었다. 가슴속에는 깊은 우울감과 분노가 자리했다. 모든 일에 화가 났다. 아폴로가 100원인 게 화가 났다. 나는 50원만 있었는데. 나는 왜 먹을 수 없어, 하며 화를 냈다. 내가 왜 화가 많은 아이가 됐는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절대 말하지 말라'던 그 남자의 말이 가슴을 옭아맸다. 어딜 가도, 심지어는 다른 도시, 다른 나라를 가도 그 남자의 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바보처럼 왜 반항하지 못했나, 왜 그 방에 들어갔나, 자책했다.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나를 괴롭혀도 그 남자에게 분노를 표출한 용기는 없었다.


분노와 우울 외에는 모든 감정을 빼앗긴 내게 생기가 필요했다. 분노라는 지옥불에서 꺼내 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사실 화내고 싶지 않았다. 나도 감정의 평화를 느끼며 봄날의 따스함을 알고, 사랑하는 이와 거닐며 진정으로 크게 웃고 싶었다. 표면만 스쳤다 결국 지나가 버리는 행복이 아닌, 가슴속 깊숙이 밀려오는 벅차오르는 기쁨을 느껴 보고 싶었다.


처음으로 사랑이란 걸 알아가고 싶었을 때, 강간 미수를 당했다. 같은 과 동기였다. 그는 내가 버둥거리며 울자 도망쳤다. 그리고는 며칠 후에 카톡이 왔다.


동기: 인생 그렇게 살지 마.

나: 무슨 소리야?

동기: 너 나 꼬신 거잖아. 꽃뱀 짓 하지 마.


어느샌가 나는 꽃뱀이 되어 있었다. 단지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을 뿐이었고, 그에겐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그러나 내가 이걸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는 것조차 비참하게 느껴져 더 이상 답장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답장이 없자 내 전 남자 친구에게 "미아 꽃뱀이다. 조심해"라고 말했다. 몸 전체가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내 몸이 갈가리 찢어지거나, 동기를 찢어발겨버리기 전에는 화가 식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세상은 무심하게 흘러갔고 나는 불을 끌어안은 채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누군가 분노나 복수는 자신을 해치는 행위라고 했다. 용서해야 한다고. 나도 더 이상 화상을 입으며 불을 끌어안은 채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도 내게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 피해자가 있는데 가해자가 없는 상황이었다. 피해자는 용서를 할 준비를 마쳤는데 용서할 대상이 없었다.


나는 나처럼 상처 입은 마음을 분노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 세상에 사과받기 위해 싸우려 한다. 미투 운동에 지지하고, 안티 페미니스트를 만나면 달려들고, 싸우는 이유는 더 이상 나처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모두가 용서할 수 있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 잘못한 사람은 충분한 사과를 하고, 벌을 받고, 피해자는 그 과정 속에서 분노를 놓아줄 수 있길 바란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내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정의 내리는 이유다. 오늘, 나와 당신의 분노가 내일 모두의 희망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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