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환 Mar 31. 2022

산불, 희망

<세상의 새로운 문앞에서>를 읽다가



지난 3월 초, 경북 울진에서 시작된 산불이 열흘 가까이 산과 들을 타고 강원도 삼척까지 가면서 서울 면적의 1/3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토록 봄을 기다렸던 적이 있었던가 싶게 겨울 내내 따뜻한 기온과 꽃을 기다렸는데, 재앙에 가까운 산불 소식으로 우울한 봄날이 시작되었다. 배가 가라앉는 걸 전국민이 생중계로 지켜봤던 일이 악몽처럼 떠올랐다. 연기 속에서 힘없이 팔랑거리는 몇 대의 헬기만이 불을 끄려고 왔다갔다 하는 걸 보면서, 산 능선을 타고 무섭게 번지는 불길을 어쩌지 못하고 그저 맥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열흘 간의 시간. 뉴스의 말미는 차를 타고 지나가다 무심결에 던진 담뱃불이 발화의 원인인 것 같다는 분석을 남기며 끝을 맺는다. 담배꽁초를 버린 천인공노할 나쁜 놈. 몹쓸 놈. 하고 익명의 죄인에게 모든 분노를 쏟아낸다. 네이버 산불 피해 지역 돕기 후원을 검색해서 몇 만원 보낸다. 그러고 나면 열흘 간의 충격과 부채감이 조금은 떨어져나가는 것 같다. 이제 봄놀이를 어디로 갈 것인가로 시선을 돌려도 될 것 같다.  아, 동해쪽은 가지 말아야겠구나.

하지만 사람들은 산불이 부주의한 누군가 버린 담뱃불 때문이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발화는 담뱃불이 했을지라도 그 불을 건조한 대기와 메마른 산을 연료삼아 꺼지지 않는 화마로 둔갑시킨 것은 바로 기후위기 때문이기도 하고, 산림청의 잘못된 숲가꾸기 사업의 결과라고도 한다. 결국 개인의 부주의가 아닌 국가적인 문제, 전인류가 만들어낸 참극이라는 것이다. 산불뿐인가, 폭염과 홍수, 이상한파. 대한민국뿐 아니라 지구 곳곳이 무너지고 파괴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봄날에 피는 꽃을 보고 있자면 이보다 좋은 시절은 없지만,  어쩌면 50년, 30년, 10년 안에 이런 좋은 봄날은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왜 이 세계는 점점 나빠지고 있는 걸까.’라는 물음을 시작으로 사회운동가 홍세화 씨와 영화감독인 이송희일 씨가 기후위기, 불평등, 노동, 사회적 차별, 교육, 진보정치, 언론 등에 관해 대담 형식으로 사유를 펼친 책이 <새로운 세상의 문 앞에서>이다. 좁은 한반도 안에서도 한쪽 끝에서는 살 터전을 잃은 이재민들이 절망 속에 빠져 있고, 또 다수의 국민들은 대통령 당선자가 몇백 억을 들여 집무실을 옮긴다고 떼를 쓰는 꼴을 보면서 절망 속에 빠져있다. 대체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 “희망이 없기 때문에 희망을 찾아야 한다는 역설이 우리의 삶을 채근하는 동력일지도 모르겠다. 그게 우리가 부서지는 세계의 귀퉁이에 앉아 희망을 물레질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이 대담은 그 희망의 이유를 찾는 여정이었다.” 

두 사람은 여섯 번을 만나 대담을 하였다. 홍세화 씨는 난민, 이주노동자 출신이고, 이송희일 씨는 커밍아웃한 성소수자 영화감독이다. ’차별과 혐오의 최전선에 있는 당사자들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모서리, 모통이, 가장자리에 앉아 나눈 여섯 번의 대담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아줄 것인가. 아니, 읽는 내가, 우리가 함께 찾아야겠다. 이제 대담 하나를 읽었다. 산불이 번지듯 가슴속에서 어떤 불길 하나가 치솟더니 온몸을, 머리를 휘젓고 다니는 기분이다. 이게 과연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란 말인가. 끝까지 읽고 나면 나는 다 타버리고 없어져버릴 것 같다. 그런데 산불로 다 타버려 잿더미가 된 산은 나무를 심는 게 답이 아니라 그냥 두는 게 산과 숲을 살리는 해법이라고 한다. “불에 탄 나무를 베어내고 온 산을 포클레인으로 헤집고 다니며 불에 타 상처입은 산림을 더 황폐하게 만들고 홍수에 취약한 곳이 되게 한다.” 그러나 그냥 두면 “불에 타 아무것도 없어 보이지만 땅 속에는 그동안 바람에 날려와 떨어져 있는 수많은 씨앗들이 새싹을 틔울 것이”라고 환경운동가이자 목사인 최병성 씨가 말한다. 나의 무지와 무심함과 방관자의 태도가 불길로 없어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세상에 대한 운동가적 열정과 희망이 싹틀 수 있다면 하고 기대해본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루쉰, <고향>)”

변방의 소리, 세상 모서리에서 외치는 소리, 힘없는 소수자가 하는 말이 더 커질 수 있도록 이 책을 읽자. 되도록 많은 이들이 읽자. 읽어서 함께 희망이라는 길을 걸어가보자.

작가의 이전글 책방이 되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