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그리고 슬픔

마침내 내면아이와 마주할 준비가 되다

by Mia 이미아

허탈함을 넘어 억눌린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 가장 먼저 마주하는 감정은 분노일 때가 많다. 부모에게서 겪은 부당함과 소외감,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쌓인 억울함이 한꺼번에 솟구치기 때문이다. 이 분노는 단순한 감정 폭발이 아니라, 오랜 시간 억눌려 왔던 고통과 불공정한 대우에 대한 강한 저항의 표현이다. 그동안 아이가 ‘내가 문제인가’라고 자책하며 돌렸던 감정들은 이제 “부모가 문제가 있었구나”라는 인식을 통해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본능적 반응으로 나타난다.


이 시기의 분노는 자기 존중감을 회복하는 첫걸음이자, 상처를 직면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부당한 대우를 받았음을 인식하면서, 더 이상 부모의 조종과 통제를 수용할 수 없다는 결심을 한다. 이 분노가 건강하게 표현될 수 있다면, 부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게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부모에게 이렇게 화를 내도 괜찮을까?’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며, 분노와 두려움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부모가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이 배은망덕한 자식아”라고 말할 때면, 다시 죄책감에 사로잡혀 자신의 감정을 정당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게 된다. 결국, 분노를 느끼면서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채 억누르거나 스스로를 탓하는 악순환에 빠진다.


이 과정에서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자신의 감정을 인정받지 못했다는 억울함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게 되며, 분노를 억제하거나 때로는 파괴적인 방식으로 표출할 위험이 커진다. 이러한 경험이 반복되면 분노를 건강하게 다루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심리적 위축이나 불안을 겪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분노의 건강한 기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분노는 억압된 환경 속에서도 자아를 지키기 위한 방어 기제이며,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의지를 표현하는 강력한 신호다. 부당한 상황을 인식하고, 자신의 경계를 설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분노는 나르시시스트 부모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한 중요한 동력이다. 부모의 비합리적인 요구를 거부하고 자신의 삶을 주도하려는 결심은 결국, 건강한 독립과 성장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분노가 무분별하게 표출될 경우, 부모와의 관계에서 더 큰 갈등을 초래하거나 자신을 더 깊은 자책 속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따라서 분노를 건강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적절한 조절과 표현이 필수적이다. 감정을 억누르기보다는, 안전한 환경에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구체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


miamehere_A_cinematic_portrait_photography_of_A_brown-haired__e6d3561e-0aba-472c-bab2-9b165fb3b719_2.png


때로는 억눌렸던 분노가 사소한 자극에도 격렬하게 터져 나오곤 한다. 나의 경우, 부모가 나르시시스트라는 사실을 깨닫기 이전에 ‘부모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자각이 먼저 찾아왔다. 내 잘못이 아니라 부모의 요구가 지나치다는 것을 인식한 순간부터, 그들의 무리한 요구나 폭언을 마주할 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가 끓어올랐다. 나는 그들의 강요를 거듭 거절하며 내 경계를 지켜 달라고 차분히 이야기했지만, 그들은 끝없이 나를 몰아붙였다. 그러나 나는 분노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지 못했고, 결국 그 감정을 꾹꾹 눌러 담은 채 속으로 삭여야만 했다.


부모에게서 실질적인 도움을 받은 기억은 거의 없다. 경제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그들은 늘 내게 기대거나 간섭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왜 그렇게 오랜 시간 그들의 존재를 참고 배려하며 살았을까. 지금 돌아보면, 그 선택의 대가는 분명했다.


결혼식 준비 역시 다르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남편과 둘이서 준비했고, 비용도 전부 우리가 부담했다. 부모의 협조나 배려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끝없이 시비를 거는 태도는 예상보다 버거웠다. 도와주지 않는 것보다, 방해받는 쪽에 가까웠다.


결혼식 당일, 나는 식장에 들어서기 전 청심환을 삼켜야 했다. 그들이 또 어떤 행동을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불안과 긴장이 온몸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예약해 둔 샵에는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았고, 출발 시각도 지키지 않았다. 이미 정해진 일정이 무너지고 있었지만, 나는 드레스를 입은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날의 나는 감정을 드러내는 신부가 아니라, 상황을 통제 하고 무마해야 하는 관리자에 가까웎다.


행사 중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부모는 예식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누가 왔는지, 축의금은 얼마나 모였는지, 돈이 어디에 있는지만 반복해서 물었다. 신부 대기실에서도, 피로연 인사를 하는 중에도, 그들은 내 하얀 드레스 자락을 따라다니며 같은 질문을 이어갔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분노보다 먼저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아, 이 사람들은 끝까지 나를 보호하지 않는구나.’


결혼식이라는 의식조차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그날에서야 분명히 확인하게 되었다.


차라리 친정 없이 결혼식을 치렀더라면 어땠을까. 생물학적인 부모보다, 내 삶을 존중해 주는 몇 사람과 함께했다면 더 나았을까. 뒤늦은 생각이지만, 그 질문은 오래 마음에 남았다.


miamehere_A_cinematic_portrait_photography_of_a_brown-haired__24f27b0e-302f-43f8-85a5-ca5d624e76d0_1.png


분노 다음에 찾아오는 감정은 깊은 슬픔이다. 이는 부모와의 관계에서 기대했던 사랑과 안정이 충족되지 않았음을 인정하는 과정에서 비롯된다. 여러 복합 감정이 얽혀 있지만, 핵심은 '부모와의 관계가 바라는 모습이 아니었다'는 상실감이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사랑을 갈망했으나, 이제 그 관계가 원하는 것이 아님을 직면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분노가 폭발한 이후 더 큰 우울감을 겪었다”라고 말한다. 억눌린 감정이 터져 나오면서, 무의식적으로 감춰왔던 외로움과 상실감이 뚜렷하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느꼈던 애정 결핍과 인정받고 싶었던 갈망이 실현되지 않았음을 자각하며, 상처받은 내면의 아이와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다. 울분을 토하는 순간에는 일시적으로 시원해지지만, 곧 부모는 바뀌지 않고 내 상처는 여전하다는 현실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이 깨달음은 “왜 하필 나에게 이런 부모가 주어졌나”라는 좌절감“내 과거는 무슨 의미였나”라는 허무함을 불러일으킨다. 부모와의 관계를 되돌릴 수 없다는 현실은 더 큰 심리적 부담이 되며, 그동안의 기대와 희망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시기에 눈물을 흘리거나 깊은 절망감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며, 이는 상실에 대한 애도 과정의 일부로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자녀는 부모와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현실적인 관계 재정립을 고민하게 된다. 슬픔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자기 이해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이때 자녀는 부모의 변화를 기대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내면을 돌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감정의 폭발 후 찾아오는 허탈감과 무력감은 성장을 위한 기회가 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부모가 아닌 자신에게 집중하는 법을 배워나갈 수 있다.


정신의학과에 방문하면 매 진료마다 15~20분 정도의 비교적 긴 상담이 이어진다. 처음으로 가족 이야기를 꺼냈을 때, 의사 선생님은 부모가 나에게 그런 부당한 일을 할 때 자매들은 어디 있었냐고 물었다. 나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선생님은 조용히 “아이고, 내 편이 하나도 없었구나”라고 말했다. 그제야 나는 가족 중에 내 편이 없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동안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일이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족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되어 금융권을 전혀 이용할 수 없었던 나는 한동안 동생의 명의로 금융 거래를 해야 했다. 대신 나는 동생의 건강보험과 연금을 꼬박꼬박 납부하며 신용을 관리해 주었다. 신용카드 한도가 겨우 30만 원에 불과하던 동생의 신용등급도 꾸준히 올려놓았다. 그러나 어느 날,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연체 관련 우편물이 도착했다. 내 이름으로는 이런 우편물이 늘 도착했기에 크게 놀랍지 않았다. 공단 측의 실수로 잘못 발송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동생이 나처럼 힘들게 살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연금과 보험을 단 한 번도 연체한 적이 없었다. 끼니를 1천 원짜리 왕만두로 때우고 속옷 한 장 사지 못하는 날이 이어져도, 동생의 신용에 해가 될 일만큼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생은 내 말을 믿지 않았고, 결국 나는 그의 손을 이끌고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직접 찾아갔다. 조회 결과, 동생의 명의로 연체된 내역은 어디에도 없었다. 예상했던 대로, 해당 우편물은 단순한 실수였다. 나는 안도하면서도, 혹시 몰라 내 이름으로 갚았던 내역도 함께 확인을 요청했다.


담당자는 내가 동생과 함께 방문한 이유가 짐작이 되었는지, 의외의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몇 년간 내가 꾸준히 납부해 온 보험료는 나 혼자가 아닌, 생부와 언니까지 포함된 세 사람의 증번호였고, 따라서 원래는 세 명이 나누어 부담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담당자는 가족들에게 그 몫을 받으라고 조언했지만, 나는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동생을 포함한 가족 누구도 사과하거나 금전적으로 보상하려 하지 않았고, 사실 나도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miamehere_A_photography_of_A_brown-haired_girl_lying_in_bed_e_3464a8b5-9def-4238-8e14-ded0dfb5cd92_2.png


결혼 전 남편과의 동거는 내게 생소한 경험이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생모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조용한 공간, 비난과 폭언 없이 맞이하는 평온한 아침이 어쩐지 어색하기만 했다. ‘내가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될까?’라는 의문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았고, 익숙하지 않은 평온함 속에서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원가족과 함께했던 시간은 늘 긴장과 불안의 연속이었다. 나는 하루하루를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눈치를 보고 조심해야 했다. 그러나 남편과 함께하는 공간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고, 그 차이는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나는 괴리감 속에서 길을 잃었고, 어쩌면 이때부터 우울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당시에는 내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일 년 동안 해가 뜨고 나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들이 계속되었고, 그다음 해에는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은 날들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남편은 나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매일 정성껏 음식을 준비하고, 내가 한입이라도 더 먹을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덕분에 평생 마른 몸으로 살아왔던 내가 살이 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살이 오르면 건강해지리라 내심 기대했지만, 어린 나의 깊은 마음의 상처가 몸으로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점점 깨닫게 되었다.


이제는 너무 무거워져서 다시 몸을 가볍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남편은 지금도 나를 먹이는 일에 진심이다. 이 정도면 아무래도 사육해서 잡아먹으려는 속셈이 아닌가 싶다. 남편은 그런 말을 하는 나를 보며 농담 삼아 '사육해서 잡아먹으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며 웃곤 했다, 는 웹소설 스타일이고. 현실에서는 '이제 밥 하지 말아야겠다'하고 실없는 소리를 한다.


남편과 함께하는 시간은 안정감을 주었지만, 동시에 이전의 생활이 정상적이지 않았단 것을 생생하게 체감할 수 있었고, 오랜 세월 몸에 밴 불안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마음속 깊은 곳에서 원가족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었다.




2024년 5월 11일의 꿈


이 꿈은 어린 시절부터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던 감정을 고스란히 비춰주었다. 내가 갖지 못했던 공간이나 물질, 먹지 못한 음식보다 더 아팠던 것은 부모의 시선이었다. 나를 향한 차가운 눈길보다도, 다른 형제를 바라보는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눈빛. 그것은 언제나 나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었다.


꿈속에서 나는 필사적으로 내 자리와 공간을 지키려 애썼다. 하지만 엄마의 시선은 번번이 나를 비껴갔고,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오빠에게만 향했다. 나는 울 것 같은 눈으로 오빠를 바라보며 애타게 불렀다. 그러나 오빠는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고, 나는 결국 꿈에서 깨어났다. 깨어난 후에도 마음속에서는 같은 말이 맴돌았다.

"오빠, 방금 엄마가 오빠를 본 그 눈, 엄마는 그 눈으로 나를 본 적이 없어."

그 순간, 오빠가 내 마음을 이해해 주길 바라는 마음과 동시에, 그 역시 엄마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생각이 스쳐 갔다. 오빠가 내가 느끼는 감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쩌면 이 말은 오빠가 아닌 나 스스로에게 던지는 독백이었을지도 모른다. 엄마의 눈길은 언제나 나를 비켜갔고,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부정할 수도 없었다.

꿈에서 깨어난 후에도 가슴 한편이 무겁게 짓눌렸다. ‘엄마가 오빠를 바라본 그 눈빛, 엄마는 나를 한 번이라도 그렇게 바라본 적이 있었나?’라는 질문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대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miamehere_A_photography_of_a_brown-haired_little_girl_sitting_0ea1ca16-0561-4840-8cf7-f9f037299cd1_0.png


분노와 슬픔이 교차하는 시기에는 전문적인 도움을 받는 것이 큰 힘이 된다. 이러한 감정들은 매우 복잡하고, 제대로 다루지 않으면 장기적인 심리적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에게 털어놓기 어렵다면, 신뢰할 수 있는 친구나 심리 상담센터, 익명의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 유익하다.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누는 것만으로도 감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일부는 예술 치료나 글쓰기를 통해 감정을 표출한다. 그림을 그리거나 글로 표현하는 것은 내면의 혼란을 정리하고, 자기 치유의 과정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감정들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고, 스스로를 비난하지 않는 것이다. 안전한 환경에서 분노와 슬픔을 건강하게 배출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하는 것이 심리적 회복의 첫걸음이다.


연구에 따르면, 분노와 슬픔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 파괴적 행동(알코올 남용, 극단적 폭식·거식, 자해 등)에 빠질 위험이 높다고 한다. 감정을 적절히 해소하지 못하면 내면의 고통이 신체적 행동으로 표출되거나, 파괴적인 방식으로 해소하려는 경향이 나타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이를 '감정 회피'의 일환으로 보며, 내면의 고통을 직접 마주하기 어렵거나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할 때 심화된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제대로 울고 분노와 슬픔을 인정하며, 주변의 도움을 구하는 과정은 결코 약함이 아니다. 이는 자신의 감정을 직면하고 건강하게 다루려는 ‘치유를 향한 용기’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표현하는 법을 배우는 중요한 기회이며, 궁극적으로는 심리적 안정건강한 관계 형성의 기초가 된다.




부모에게 직접 분노를 표출하는 상황이 오면, 갈등이 쉽게 해결되지 않을 수 있다. 부모가 공격적으로 맞서거나 “네가 미쳤구나”라며 무시하기도 하고, 오히려 자기 연민을 과장해 아이를 죄책감에 빠뜨릴 수도 있다. 그래서 종종 ‘부모와의 직접 대면’보다는 먼저 안전한 공간에서 감정을 정리하는 단계를 거치길 권한다. 각자의 고유한 상황에 따라 완전한 단절이 필요한 경우도 있고, 조심스럽게 대화를 시도해 볼 수도 있다.


분노와 슬픔은 제거해야 할 나쁜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그 감정들이 오랜 억압 끝에 올라온다는 것은, 아이가 마침내 자신의 내면과 마주할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일 수 있다. ‘나는 화가 난다, 그리고 슬프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부모의 통제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고, 감정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이는 독립적인 존재로서의 첫걸음이며, 감정을 직면하고 인정하는 과정 속에서 점차 건강한 경계를 설정하고 내면의 균형을 찾아갈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감정들을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것은 자신을 이해하고 치유하는 데 필수적인 단계가 된다.


억눌렸던 감정들이 터져 나오고 나면, 내면아이는 비로소 상처에 구체적인 이름을 붙이고 이를 직면할 준비가 된다. 자신의 경험을 객관적으로 정의하고 명명하는 과정은 치유의 중요한 출발점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트라우마의 명명'이라고 부르며, 이는 상처를 단순한 감정적 혼란에서 명확한 문제로 전환하는 과정이다. 이제 아이는 자신의 경험을 부정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나는 이러한 상처를 입었고, 그것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고 싶다"라고 말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miamehere_A_cinematic_close-up_photography_of_a_brown-haired__d765ab88-f194-4718-8d4a-c57b5ea5fdc9_0.png


keyword
이전 10화그들은 나르시시스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