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상처에 이름을 붙이다

과거를 직시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일

by Mia 이미아

학대와 폭력으로 인한 감정 폭발을 겪고 나면, 자신의 상처가 무엇인지 알아보는 시간이 찾아온다. 이를 "내 상처에 이름 붙이기"라 한다. 이는 단순한 기억 정리가 아니라, 받은 상처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 영향을 깊이 이해하는 심리적 탐구 과정이다. 나르시시스트 부모의 억압과 조종으로 얼룩진 기억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그 상처가 삶의 선택과 관계 형성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구체적으로 인식한다. 이를 통해 행동 패턴을 분석하고, 상처가 삶에 어떻게 작용했는지 깨닫게 된다. 또한 과거 경험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상처를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치유해야 할 대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상담에서 자주 권유하는 방법 중 하나는 라이프 타임라인(Life Timeline) 작성이다. 출생부터 현재까지의 주요 사건을 시간 순으로 나열하고, 각 시기별로 느낀 감정을 기록한다. 이를 통해 과거 경험이 현재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 시절 부모의 폭언이 현재의 낮은 자존감이나 인간관계 회피로 이어졌음을 인식한다. 특정 시기의 반복되는 패턴을 발견하며 상처가 삶의 다양한 측면에 어떻게 작용했는지 파악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감정과 행동이 과거 경험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닫고, 현재와 미래의 선택을 주체적으로 조율할 기회를 얻는다.(글 하단에 라이프 타임라인 예시를 적어두었다)


상처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상보다 많은 감정이 숨어 있음을 알게 된다. 단순히 분노와 슬픔뿐 아니라 외로움, 수치심, 죄책감, 불안, 두려움 등이 복합적으로 내면을 형성한다. 예를 들어 '내가 더 착하고 뛰어났다면 부모의 폭언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라는 자책에서 오는 죄책감이 있을 수 있고, 부모의 사랑을 얻지 못한 데 대한 깊은 상실감혼란이 동반되기도 한다. 이러한 감정들은 억압된 채 의식 아래에 머무르다가, 특정 사건이나 상황에서 예상치 않게 떠올라 현재의 행동과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



어릴 때부터 아픔은 늘 혼자 감당해야 했다. 몸이 아파도 눈치가 보여 병원에 가지 못했고, 아픈 것은 마치 죄를 짓는 것처럼 느껴졌다. 부모의 비난을 피하고 싶어서 아픔을 숨기며, 그렇게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는 게 당연해졌다. 참는 것이 미덕이라 배웠고, 결국 스스로를 돌보는 일마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부모에게 작은 기대를 걸 때마다 번번이 실망했고, 내가 아플 때조차 당연히 받아야 할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다른 가족들이 나와는 다르게 보호받는 모습을 보며 서글프고 서운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수십 년의 습관은 무섭다. 원가족을 벗어난 지금도 여전히 건강을 챙기는 일이 죄책감으로 다가오고,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려는 오래된 습관이 나를 지배한다.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그저 버티는 것이 목표가 되어버렸고, 솔직히 고백하자면, 몸이 유난히 아픈 날엔 어떤 노력도 충분하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이 나를 짓누른다. 내 생계와 건강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불명열이 시작된 것은 2023년, 자각한 시점은 10월 초쯤이었다. 평소 체온이 낮은 편이라 이러한 증상은 이상하게 느껴졌다. 해열제를 먹어도 차도가 없었고, 잠을 더 자도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렇게 증상을 관찰하며 버티던 중, 갑작스럽게 시아버님의 상을 맞이하게 되었다.


남편은 이미 부산에 있었다. 나는 우선 강아지들을 맡아줄 사람을 찾아야 했고, 내 몸 상태가 서울에서 멀리 부산까지 이동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지만, 이런 생각들은 뒤로 미뤄야 했다. 급히 친구들에게 부탁해 강아지를 맡기고, 가장 빠른 기차를 예약해 부산으로 향했다. 기차를 놓칠까 봐 조금 뛰었는데, 그로 인해 KTX 안에서 두 시간 넘게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부산으로 가는 내내 기침을 계속한 셈이었다.


부산역에 도착했을 때 증상은 더 심각해졌다. 어지럼증이 심해지고 앞이 잘 보이지 않아 길을 찾을 수 없었다. 평소 길 찾는 데 자신 있던 나인데, 이 상황에서는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어서 두려웠었다.


어지럽고 울렁거려 음식을 먹을 수도 없었고,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다. 듣지도 않는 해열제를 4시간마다 복용하며 어떻게든 버텼다. 아버님 상을 잘 치르고 난 후, 예상치 못한 일이 나를 깊이 상처 입혔다. 부산에서 아버님 상을 치른 후 집에서 단 둘이 남게 된 시가 친척이 고인을 모독하는 이야기부터 각종 부적절한 말들을 쏟아냈다. 나는 상을 당하신 어머님이 상처받지 않으시도록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그날 새벽, 내 기억으로는 처음으로 공황 증상이 일어났다. 공황 증세는 15~20분 정도 지나면 가라앉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비 허그를 하고, 심호흡을 하고, 친구와 통화를 하며 버텼다.


통화 중에 친구의 말이 묻어두었던 내 감정을 건드렸다. "네가 친정이 있었으면 이렇게 아픈데 보냈겠니? 아니, 애가 열이 두 달이 넘게 나는데..." 친구의 목소리가 먼저 떨리며 울먹였고, 그 소리에 나도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내가 이렇게 서럽고 외로웠구나, 하는 생각이 밀려왔다.


며칠 후, 병원에서 비슷한 말을 또 들었다. "두 달 동안 열이 났는데 병원을 한 번도 안 갔어요?" 채혈을 하고, 해열제를 처방받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제야 열이 나는 것을 참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가슴 한가운데가 뻥 뚫려 싸늘해지는 기분이 들었고, 그때 처음으로 나를 돌보는 일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처를 명확히 인지하는 것은 예상보다 큰 해방감을 준다. 이전에는 '왜 내가 우울해지는지' 몰랐다면, 이제는 '이 상황이 예전 상처를 건드리는구나'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자기 판단에 대한 확신을 높여주고, 불필요한 자책을 줄이는 데 기여한다. '내가 괜히 예민해서 그런 게 아니었구나'라는 깨달음이 반복될수록 자존감도 점차 회복된다. 이때, 감정 일기를 통한 자기 탐색은 과거의 상처와 화해하고 현재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중요한 과정이다. 감정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기록하는 습관은 감정 조절 능력을 향상하고 삶의 주도권을 회복하는 데 기여한다.


물론, 과거를 되짚다 보면 잊고 지냈던 고통이 다시 선명해져 오히려 힘들 수 있다. 어린 시절 부모의 폭언이나 편애 장면이 떠올라 악몽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곪아 있던 상처가 표면화되면서 자연스럽게 거치는 과정이기도 하다. 되도록 전문가나 지지자를 곁에 두고 안정적으로 진행하는 편이 좋다.




지난해 지속되는 불명열척수낭종으로 인한 통증으로 많은 시간을 누워서 보냈다. 외출은 병원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그러다 보니 드라마를 종종 시청했는데, '엄마친구아들'이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무척 놀란적이 있다. 여주인공의 상황이나 가족관계는 나와 전혀 다르지만, 한 공간이 내 학창 시절을 떠오르게 했다.


오랫동안 미국에 정착해 살았던 여주인공 석류의 방은 그동안 김치통, 죽부인, 잡동사니들을 보관하고 나물을 말리는 창고, 골방으로 쓰이고 있었다. 크기만 다르지 드라마 제작진이 내 어릴 적 방을 보고 온 것처럼 소름 돋게 똑같은 환경이었다.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갑자기 귀국한 석류는 그 방에서 이부자리를 펴고자는데, 서너 평쯤 되어 보이는 그녀의 방은 이불 한 채를 다 펴고도 공간이 좀 남았다. 내 방은 이불을 다 펼 공간이 없었다.


사실, 내 방은 애초에 방이 아니라 창고였던 것이다. 어느 날 집에 오신 할아버지께서 내 방을 보고 충격받은 얼굴로 '사람이 어떻게 이런 데서 자니..'라며 혀를 차셨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내가 고등학생쯤, 동생이 초-중학생쯤이었을 텐데, 바로 옆의 동생 방은 김치통 대신 침대와 책상이 있었고, 에어컨도 따로 달아주었다.


드라마에서는 석류 엄마가 그녀의 귀국을 받아들이고 방을 정리하고 새롭게 꾸며주는 장면이 나온다. 석류가 외출 후 돌아왔을 때 그녀를 위해 정리된 방은 그녀의 존재를 인정하고 환영한다는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반면, 내 과거와 비교되며, 그런 변화와 배려를 경험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아프게 다가왔다.


내 방은 이불을 다 펼칠 공간이 없었던 점 빼곤 소름 돋게 똑같다.


'내 상처'라고 정확히 부르는 작업은 단순히 과거를 정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원가족을 넘어서는 중요한 치유 과정이다. 과거의 상처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후손과 주변 사람들에게도 건강한 관계의 기초를 마련해 준다. 상처를 직면하고 극복하려는 노력은 부정적 감정의 연쇄를 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며, 가족 내 반복되는 고통의 고리를 끊는 출발점이 된다.


이 과정에서 개인은 자신에게 가해졌던 학대와 조종의 패턴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타인에게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심리적 방어 기제를 구축할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은 단순히 자신을 치유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건강하고 자율적인 인간관계를 형성하려는 의지로 확장된다. 이는 나아가 자신을 독립적이고 온전한 존재로 세우는 데 필요한 핵심 단계라 할 수 있다.


과거를 되짚는 과정에서 고통이 떠오를 수 있지만, 이는 곪아 있던 상처를 치유로 이끄는 필연적인 단계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자신을 비난하지 않는 것이다. 억눌렸던 감정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순간, 내면의 균형과 평화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이는 단순히 과거를 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처와 화해하며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는 기반을 마련하는 작업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마침내 나 스스로를 돌보는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아래는 라이프 타임라인 작성에 도움을 주기 위해 만든 가상의 인물의 예시이다.

유년기(0~6세)

- 주요 사건:부모의 잦은 꾸중, 형제와의 비교

- 감정: 위축, 불안, 관심받고 싶은 욕구

- 영향: 타인의 평가에 지나치게 민감해짐, 자존감 낮음


초등학교 시절(7~12세)

- 주요 사건: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려 노력, 성적 압박, 친구 관계에서 소극적 태도

- 감정: 두려움, 인정받고 싶은 욕구, 외로움

- 영향: 완벽주의 성향 형성, 비판에 대한 극도의 예민함


청소년기(13~18세)

- 주요 사건: 부모의 통제로 인한 독립 시도 좌절, 꿈에 대한 무시, 심한 간섭

- 감정: 분노, 좌절, 무기력

- 영향: 자아 정체성의 혼란, 의사결정 회피 경향


성인 초반(19~25세)

- 주요 사건: 대학 진학 후 부모와의 거리감 형성, 새로운 관계 시도, 과거 기억의 재해석

- 감정: 해방감, 남은 불안, 자립 욕구

- 영향: 부모와의 감정적 거리 두기, 자기 돌봄의 필요성 인식


현재(25세 이후)

- 주요 사건: 상담 및 자기 이해 과정 시작, 부모의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노력

- 감정: 혼란, 성장 욕구, 점진적인 자립 의지

- 영향: 건강한 관계 형성을 위한 노력, 자기 존중감 회복 진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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