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위에 선 사람들, 일상과 공존
나는 일할 ‘수 있다’와 ‘없다’ 사이 어딘가에 존재한다. 걷는 것도, 앉는 것도, 서 있는 것도 가능하지만 오래 버티지는 못한다. 몇 분만 걸어도 허리와 골반에 통증이 쌓이고, 다리가 저린다. 앉아 있으면 배와 다리에 통증이 밀려오고, 누워 있는 것도 편하지 않은 날이 있다. 몸은 늘 가능과 불가능의 경계 위에서 흔들린다.
글을 쓸 수 있다. 그러나 쓰고 나면 하루를 온전히 회복에 써야 한다. 집중의 대가로 피로가 밀려온다. 가용 시간은 손에 쥘 만큼 짧고, 내 몸이 허락하는 만큼만 움직일 수 있다. 그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나는 그 안에서 살아가는 법을 조금씩 배우고 있다.
사회의 서류는 늘 묻는다. “일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있다면 ‘예’, 없다면 ‘아니오’. 하지만 나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일할 수 없지는 않지만, 언제든 일할 수도 없다. 그 사이 어딘가에 어색하게 존재한다. 제도의 눈에는, 진단서에도, 언어에도 나는 없다.
“나의 건강 상태를 고려했을 때, 일할 수 있나?”라는 질문은 신체적 가능성을 넘어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이다. ‘나는 아직도 쓸모 있는 사람일까? 나는 이대로도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계속해서 삶을 감당해 낼 수 있을까?’ 그런 질문들이 불쑥불쑥 문장 뒤에 따라온다. 그 말들이 내게 닿는 순간, 마음 한편이 쓸쓸하게 흔들린다. 한때는 그 질문 앞에서 스스로를 자책했지만, 지금은 그 감정을 느끼되 붙잡히지 않으려 애쓴다.
나는 늘 누군가에게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해야 했다. 동시에 일할 수 없는 날도 있다는 걸 설명해야 했다. 그런데 이제 그 간격은 날이 아니라 시간 단위로 좁아졌다. 증명되지 않는 몸, 전달되지 않는 고통. 가끔은 나 자신조차 이 증상이 실재하는지 묻게 된다.
그럴 때 지나영 교수의 말을 떠올린다. 자율신경계 이상으로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던 시절, 열댓 명의 의사가 그녀에게 “불안”이나 “우울”이라 말했다. 정신과 의사인 그녀는 그 말 앞에서 자신을 의심할 뻔했다고 했다. 나는 그 심정을 너무 잘 안다. 나도 같은 말을 들었고, 내 고통을 의심했던 시간을 통과했다. 그래서 이제는 나를 의심하게 만드는 말들에 더 민감해졌다.
내가 앓는 것은 늘 뚜렷하지 않다. 검사 결과는 정상이지만, 나는 아프다. 병명이 없다는 이유로 병이 아니게 되고, 병이 아니니 환자도 아니게 된다. 일상은 무너지고 있지만, “검사 결과는 괜찮다”는 말이 나를 무력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나는 일하고 싶다. 스스로를 책임지고, 무언가에 기여하고 싶다. 그러나 그 열망은 자주 오해받는다. 규칙적으로 일할 수 없다는 말, 쉬지 않으면 일할 수 없다는 말을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하루의 에너지를 쪼개며 살아가는 방식을 상상하지 못한다.
나는 하루의 에너지를 쓸 수 있는 시간으로 나눈다. 앉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을 계산하고, 회복 시간을 고려해 일정을 짠다. 외출 다음 날은 며칠간 일정을 비우고, 약속이 없는 날에 글을 쓴다. 아무리 신중히 계획해도 내 몸은 예고 없이 무너질 때가 있다. 누군가에겐 이것이 특별한 일이겠지만, 나에겐 일상이다.
“일할 수 있다”는 말은 설명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사회의 구조가 바뀌기를 바란다. 조금 일할 수 있는 사람도, 하루에 두 시간만 일할 수 있는 사람도, 각자의 방식으로 일할 수 있도록 제도가 설계되기를 바란다.
불완전한 상태에서도 지속 가능한 삶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병명이 아니라 기능의 정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언어와 제도가 필요하다. 그 시작은 ‘일할 수 있어요’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쓰는 일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병명과 장애 등급이 아닌 기능과 회복 가능성을 중심으로 한 지원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예컨대 ‘기능기반 보장제도(Function-Based Benefit System)’는 하루 활동 가능 시간, 회복 간격, 이동 거리 등 구체적 기능 데이터를 기반으로 지원을 설계한다. 고용 형태나 근로 조건도 이러한 기능 점수에 따라 조정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완치나 장애 등록을 기준으로 삼지 않고, 회복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회복형 생활인 인증 제도’를 도입할 수도 있다. 이는 소득세 감면, 공공 업무 우선 배정, 맞춤 근로 매칭 등으로 실질적인 보호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무엇보다 증명 대신 ‘서술’을 중심으로 한 사회보장 구조가 필요하다. “이 사람은 하루 3시간을 초과해 일하면 이틀은 누워 있어야 한다.” 이런 문장이 의료적 판단만큼이나 제도적 효력을 가지는 사회. 그 사회에서는 더 이상 ‘일할 수 있어요’라는 말이 설명이 필요한 문장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질문들은 수시로 내 마음을 흔든다. 하지만 나는 오늘도 그 경계 위에서, 내 방식대로 일상을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