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신뢰 위에 피는 희망
나는 ‘믿지 않는 법’을 배워야 했다. 신뢰는 언제나 위험했고, 기대는 곧 실망으로 돌아왔다. 거짓말과 조작, 침묵과 회피 속에서 진실을 가려내는 일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 어릴 적부터 주변의 말을 있는 그대로 믿는 건 어리석은 일로 여겨졌고, 의심은 살아남기 위한 기술이었다. 사람의 표정 하나, 말끝의 억양 하나에도 숨은 의도를 읽으려 애썼다. 그것은 세상을 불신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불안했기 때문이다.
의심은 나를 보호했지만, 동시에 나를 갉아먹었다. 믿음이 자라야 할 자리에 경계심이 자리 잡았다. 사람을 믿지 못하니 관계는 시작부터 벽이 세워졌고, 가까워질수록 불안이 커졌다. 상대의 말 한마디에도 긴장했고, 머릿속에서는 수십 가지 가능성을 돌려보며 대비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지키려다 오히려 고립되었다. 늘 피로했고, 불안했다. 그러나 경계를 풀면 다시 상처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나를 같은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진심을 내어준 관계일수록 배신의 상처는 깊었다. 가족, 제도, 병원 그리고 사람들. 믿음을 걸었던 곳일수록 나를 무너뜨렸다. 진료실에서 의사는 내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고, 가족은 내가 존중받아야 할 인간이라는 사실 자체를 부정했다. 나의 고통은 ‘예민함’이나 ‘피해의식’이라는 말로 축소되었고, 그 말들은 내 경험의 진실을 지워버렸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나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정말 내가 과민한 걸까?’, ‘내가 잘못 본 걸까?’ 그렇게 내 안의 신뢰는 조금씩 금이 가고, 결국 산산이 부서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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