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사라진 자리
감정이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한 건, 너무 오랜 시간 마음이 깨어져 있던 탓이었다. 울분이 목에 걸린 채로 삼켜졌고, 억울함은 말로 옮기지 못한 채 쌓였다. 분노는 어느새 식어버렸고, 슬픔조차 모서리가 닳아 감정의 형태를 잃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화가 나야 할 일에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기쁨이나 기대, 두려움 같은 감정들은 다 같은 색으로 희미해졌다. 감정의 온도가 점점 낮아지며, 내 안의 모든 감각이 일정한 회색빛으로 변해갔다.
마음은 느끼는 대신, 관찰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보듯, 나에게 일어난 일도 타인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내 웃음소리가 들려도, 그 소리가 나와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 멀었다. 나는 그저 살아 있는 사람의 형태를 유지했을 뿐, 내 안의 세계는 이미 조용히 식어가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도 낯설었다. 하루가 유난히 길게 늘어지거나, 한순간에 흘러 사라지기도 했다. 울 수도, 화낼 수도, 기뻐할 수도 없었고, 그 무감각조차 이제는 자연스러웠다. 그렇게 마음은 서서히 닫혔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나는 감정을 잃은 것이 아니라, 버틸 힘이 다한 것이었다. 마음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천천히 문을 닫았고, 그 안에서 아주 깊은숨을 내쉬듯 멈춰 서 있었다. 느끼지 않음으로써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그것은 냉정함이 아니라, 절박한 생존의 본능이었다. 그렇게 마음은 일시적으로 잠들었고, 나는 그 침묵 속에서 겨우 나를 붙잡고 있었다.
감정이 사라진 자리에는 깊은 공백이 남았다. 하루가 아무리 바쁘게 흘러가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했고, 기쁨과 슬픔의 경계가 희미해졌다. 습관적인 웃음은 입가에 머물렀지만, 마음까지 닿지 않았다. 모든 감정이 마치 유리벽 너머에 있는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 이러한 공허는 단순한 허무감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음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완충지대였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대신,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 상태. 그러나 그 고요함 속에서도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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