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5월 14일 수요일 / 첫 째 날 / 인천
1. 여행의 이유
이탈리아로 간다. 이 문장을 공책의 첫 페이지에 얼마나 적고 싶었는지 모른다. 어떤 문장으로 이 여행의 시작을 표현할 수 있을까? 신혼. 유럽. 여행. 하루, 일주일, 월별 시간표를 세워 살아가는 내가, 계획하지 않았고 이제는 흥미를 잃어버린 것들. 그래서 가기 전 날에도 밀린 숙제를 하듯 짐을 쌌다.
가방에 무엇을 넣어갈까? 짐을 싸면서 죽음을 준비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무엇을 남겨두어야 할지, 없애버려야 할지, 꼭 쥐고 떠나야할지... 가벼운 카메라를 챙겼다. 사진 찍기가 취미는 아니지만 아름다운 순간을 의식해서 담아볼까 했다. 메모리 카드를 정리하려고 남겨둔 사진들을 처음부터 훑어봤다. 오키나와 바다. 빨간 점퍼를 입고 바다를 거닐고 있는 승일. 나은이와 마신 홍차. 두더지손 가게의 짜이. 부엌에 비친 햇살 조각. 대칭을 이루는 주홍빛 침실. 마당에 놓은 꽃 화분. 나은이에게 청첩장을 주며 먹은 생크림케이크. 친구들과 집들이를 하던 찻자리, 빈둥대던 오후 화목난로 옆에서 승일이와 장난치며 찍은 사진, 솔빛이 준 별꽃, 길가에 핀 들꽃, 차려 먹는 저녁, 결혼식 날 풍경이 있었다. 그 어떤 물건보다 사진을 삭제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 Delete를 누르기 전에 사진을 잊지 않으려고 눈에 꾹꾹 담았다. 천천히 옆으로 넘기면서.
우리 집에서 뭘 가져가면 가장 슬플까? 승일이가 물었었다. 음... 흔들의자? 솜이가 그려준 청첩장 그림과 잇다의 액자? 다은이가 만들어 준 집 타일? 집이 홀라당 다 타버린다면? 몰입이 안 되어서 그런지 크게 걱정이 되지 않았다. (승일이는 화목난로라고 답했다.) 그런데도 이 집을 오래 비우는 것이 크게 내키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그릇을 닦아 넣고, 물을 끓여 홍차를 태우고, 친해져가는 큰 방 책상에 앉아 타로 명상이든 글쓰기든 딴짓을 한다. 승일이와 마주 앉아 아침, 점심, 저녁을 해 먹고, 아이들 수업을 나가고, 작가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자주 청소와 설거지, 반찬 만들기를 한다. 차를 타고 나가 친구들을 만나고 안부를 묻고 꿈을 꾼다. 이런 생활이 좋아져버려서 떠나기가 아쉽다. 이제 좀 내가 해야 할 일을 알 것 같고, 할 수 있을 토양이 마련된 것 같은데... 마당에서 바라본 빨간 현관문과 펄럭거리는 지붕의 검정방수포, 누련 벽에 쳐진 목재, 비스듬한 지붕이 어른거려 자꾸 뒤를 돌아 기억을 더듬거린다.
그래서 지금 내게 여행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 지금은 마치 내 아이가 너무 예뻐 어쩔 줄 몰라서 줄곧 아이만 바라보고 있는 엄마처럼 일상에 몰두해 있다. 하동에 오고, 일을 하고, 집을 구하고, 새 가족을 만나고, 집을 고치고, 결혼식을 하고... 자연스러운 흐름이겠지만 휩쓸리지 않으려고 침몰하지 않으려고 애를 많이 썼던 것 같다. 여기가 맞는 길이야... 하며 스스로를 다독이고 또 맞는 길로 만들어가면서. 그렇게 애정이 생겨버렸다. 이 생활에 대해서. 그런데 꼭 이 모습이 정답은 아니지 않은가?
지금이야말로 잠시 떨어질 때이다. 내가 맞다고 쌓아온 모든 것들로부터. 내가 좋아한다고 믿어왔고, 아름답다고 여겨왔던 모든 것들을 뒤로 두고 알 수 없는 어딘가로 떠나야 한다. 그 곳이 어쩌다 이탈리아가 되었을 뿐이지. 여수든, 제주든, 태국이든, 몽골이든... 상관없었을 것이다. 기차와 비행기, 두 발의 힘을 빌려서 마음을 잠시 익숙한 자기로부터 떼 내어 본다. 언젠가 해야 할, 까마득한 긴 여행의 연습이 될 수도 있겠다. 지구를 사랑하고 싶다. (죽기 전에 어떤 유언을 남기게 될까?)
2. 여행에서 기대하는 것들
-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노력할 수 있을까?
- 지중해 태양을 머금은 싱싱한 채소들
- 커피의 맛
- 바다에 둥둥. 바다를 좋아하게 될까?
- 승일이과 나눌 대화들. 희망, 환대의 계획, 다져갈 사랑
- 어떤 질문을 찾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