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경 Jan 19. 2024

20대에게 추천하는 시 5가지

나의 인생 시 모음





시가 가지는 의미의 함축성과 은율을 좋아한다. 


저마다의 아픔 혹은 사랑, 사회의 부조리를 노래하는 시들은 

해당 시를 만나는 독자가 인생의 어느 시점에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읽히기도 한다. 


가장 좋아하는 시에 무감각해지는 순간이 오고, 

몰랐던 시를 발견한 뒤에 전율이 일어 한 동안 해당 시를 필사하며 다닌 적도 있었다. 


아마도 인생의 우리가 어떤 경험을 하며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따라 

공감할 수 있는 범위와 영역 역시 변화하기 때문이리라. 


이에 내 인생 시들을 과거부터 현재 순으로 

5가지 선별해 소개해보고자 한다. 








▶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1


어디까지갈수있을까 한없이흘러가다보면


나는밝은별이될수있을것같고


별이바라보는지구의불빛이될수있을것같지만


어떻게하면푸른콩으로눈떠다시푸른숨을쉴수있을까


어떻게해야고질적인꿈이자유로운꿈이될수있을까




  먼저, 최승자의  <이 시대의 사랑> 중,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라는 시이다.


 해당 시에서는 1 단락 중, 시에서만 가능한 시적허용으로 형식을 자유롭게 사용하여 꿈꾸는 듯한 표현을 한 부분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인상적이었다. ‘어디까지갈수있을까/ 한없이흘러가다보면 //나는밝은별이될수있을것같고’ 로 시작되는 해당 시는, 이처럼 문장 사이에만 띄어쓰기가 있고, 그 외에는 모두 문장 단위로 촘촘히 붙어 있다. 이에 심적으로 여유가 없는 촉박한 느낌을 주는데다가, 내용 자체도 가능성과 이에 대한 의문을 담은 내용이라 당시 취엄준비를 하던 필자에게는 문장만으로 공감이 되었었다.




‘어떻게하면푸른콩으로눈떠다시푸른숨을쉴수있을까/어떻게해야고질적인꿈이자유로운꿈이될수있을까’로 끝나는 1문단은 특히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당시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게 많아 방황하던 나의 상황을 정확히 묘사하는 듯했다. ‘푸른 숨’은 그래서 ‘푸른 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청춘(靑春)의 이상을 담은 숨으로 해석했고, ‘어떻게하면’이라고 질문하는 것 자체가 꿈을 꾸는 모든 이들의 ‘고질적인’ 질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특히, 인생이 어디로 어떻게 나아갈지도 모르지만, 가능성과 희망만 품은 채 이미 길이 튼 강물 물줄기를 따라 ‘한없이흘러가’는 삶을 살아가는 상황, 크고 넓은 세상 속에 ‘푸른콩’만큼이나 작게 느껴지는 스스로에 대한 자의식까지 모두 대학 생활 중 방황하는 필자의 모습으로 느껴졌다.










▶ 굴절




물에 잠기는 순간


발목이 꺾입니다




보기에 그럴 뿐이지


다친 곳은 없다는데




근황이 어떻습니까


아직, 물속입니까




다음으로, 작년 봄에 합정역 역사에서 신도림 방면 열차를 기다리며 발견한 시, 이승은의 <굴절>을 소개한다. 2022년 5월 12일 11시 26분 경 막차를 기다리며 발견한, 스크린도어에 적혀있던 고딕체의 정갈한 6문장은 당시 심적으로 가라앉고 있던 필자에게 시적 감수성을 일깨워주었었다. 당시 필자는 회사에서 일을 하던 중이었고, 중요한 프로젝트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 매일 자발적으로 야근을 하며 육체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많이 지친 상태였다. 




이에, ‘물에 잠기는 순간/ 발목이 꺾입니다’ 는 표현을 본 순간, 스스로의 지친 심신을 물에 일렁이는 잔상처럼 되돌아보게 된 듯하다. ‘보기에 그럴 뿐이지/ 다친 곳은 없다는데’ 로 넘어가면서부터는 매일을 열정적으로 살아가며 주변 사람들에게는 응원과 박수를 받던 시기였지만 속으로는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의심을 가질 정도로 힘들어하고 있었던 스스로의 외적, 내적 자아 간의 괴리감을 상기할 수 있었다. ‘근황이 어떻습니까?/ 아직 물속입니까?’로 상투적이지만 진정성있는 이 질문은, 따라서 물에 잠기고, 막차에 잠기고, 현실적인 부분에 자아가 억압된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굴절된 스스로의 몸을 바라보면서도 꺾이지 않아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부분인 마음까지도 굴절되지도 않았는지 스스로에게도 묵직한 질문을. 던지게 되는 시였다. 








 October


3.


Snow had fallen. I remember


music from an open window.


Come to me, said the world.


This is not to say


it spoke in exact sentences


but that I perceived beauty in this manner.


...(중략)...


Come to me, said the world. I was standing


in my wool coat at a kind of bright portal —


I can finally say


long ago; it gives me considerable pleasure. Beauty


the healer, the teacher —


death cannot harm me


more than you have harmed me,


my beloved life.




세번째 시는 루이즈 글릭의 <Averno> 중, October를 소개하고자 한다. 정은귀 교수님의 수업 중 잠시 스쳐지나가듯 수업 말미에 소개해주신 시인이었는데, 왜 인지 모르게 시를 찾아보고 싶었고 그 이후에 누군가 ‘영문학과 전공이면, 가장 좋아하는 시는 뭐야?’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녀의 시 중 ‘눈풀꽃’을 이야기하게 되었었다. 그리고 작년 교환학생 생활 중 런던에 갔을 때, 포토벨로의 한 작은 서점에서 그녀의 시집을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구입하게 되었고, 이후 혼자서 폴란드 여행을 하며 해당 시는 처음으로 읽게 되었다. 




기나 긴 배경을 설명한 연유는, 해당 퇴사 이후 교환학생 생활과 유럽여행의 마음가짐을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아마 당시에는 혼자서 여행을 많이했음에도 스스로 계속해서 이 여행을 왜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미를 계속 찾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마침 10월에 떠난 여행이었기에 10월이라는 제목 밑에 두번째 문단 첫 줄인, ‘Come to me, said the world.’는 그렇게 필자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들어오게 되었다. 


(물론, 폴란드라는 나라에서 폴란드어에 비해 영시가 더 한국어처럼 잘 읽힌부분도 있다.) 


‘What others found in art,/ I found in nature. What others found/ in human love, I found in nature.’라며, 자연의 아름다움이 상처를 치유해주고 지혜를 주는 힘이 있음을 얘기하는 문장에서는, 그래서 더더욱 내가 이 여행에서 무언가 의미있는 성과를 만들어야겠다는 부담감을 떨치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다는 성찰을 할 수 있었다.








▶관찰기


 자신의 털을 핥는 표범의 혀는 따뜻할까.


 


나는 나의 머리카락 한 올도


희거나 검게 만들 수 없다.


 


어미가 알을 낳고 알에서 새끼가 나오고


새끼가 투명해지고


알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낳는다.


 


버려진 식물처럼 나는


아무렇게나 자랄 것이다.




네번째로는, 하재연 시인의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 중, ‘관찰기‘를 선택했다. 


나 스스로도 몰랐던 가치관을 일깨워주고 스스로를 설명할 수 있는 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털을 하는 표범의 혀는 따뜻할까.’로 시작하는 시는, 

동물이 스스로의 몸을 혀로 핥아주는 행위를 마치 인간과 비교하듯 표현한다.


 ‘따뜻할까’라는 동사를 사용한 점에서 그렇게 생각했지만, 

또 질문을 던지며 마친 것으로 보아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렇지 않음을 대조하는 듯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버려진 식물처럼 나는’이라는 마지막 문장과, 

이어지는 ’아무렇게나 자랄 것이다.’라는 이 두 문장만으로 해당 시를 선택했다. 


인간 존재가 스스로의 몸을 핥는 표범처럼 자기 자신을 돌보아줄 수 없다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하고 생존해나가겠다는 자신감있는 선언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버려진 식물은 그 환경에서도, 콘크리트 사이나 척박한 땅이라도, 온 힘을 다해 생존하기 위해 나름의 애를 쓰면서 살아나간다. 하지만 그 모습에 ’아무렇게나‘ 라는 말로 자유로운 이미지를 선사해버림으로 인해 식물은 당당하고 개성있는 독자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에 노르웨이라는 미지의 세계에서도 어찌저찌 잘 적응해서 살아가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투영해보며, 스스로를 ‘버려진 식물’로 정의해보았다.









▶ 올 여름의 인생공부


... (중략)


 그러므로, 썩지 않으려면


   다르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다르게 사랑하는 법


   감추는 법 건너뛰는 법 부정하는 법.


   그러면서 모든 사물의 배후를


   손가락으로 후벼 팔 것


   절대로 달관하지 말 것


   절대로 도통하지 말 것


   언제나 아이처럼 울 것


   아이처럼 배고파 울 것


   그리고 가능한 한 아이처럼 웃을 것


   한 아이와 재미있게 노는 다른 한 아이처럼


  웃을 것.




   다섯번째는 다시 최승자 시인의 <이 시대의 사랑> 중, ‘올 여름의 인생공부’라는 시를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해당 시는 내가 앞으로 어떤 태도로 인생을 살아가고 싶은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화자는, ‘그러므로, 썩지 않으려면/ 다르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했다’ 라며, ‘그러면서 모든 사물의 배후를/ 손가락으로 후벼 팔 것/ 절대로 달관하지 말 것/ 절대로 도통하지 말 것/ 언제나 아이처럼 울 것/ 아이처럼 배고파 울 것/ 그리고 가능한 한 아이처럼 웃을 것/ 한 아이와 재미있게 노는 다른 한 아이처럼 웃을 것.’ 이라고 얘기한다. 이전 문단에서 제시된 상황에 기반하면, 화자는 우리가 아무리 썩어가는 것처럼 느껴져도 절대로 동심과 인간 개별성의 중요성을 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이들은 보이는 거의 모든 사물에 감동하고 이를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울고 웃으며 본인의 감정 표현에도 솔직하다. 


나 역시 ‘버려진 식물’이더라도, 썩지 않기 위해서는 이처럼 ‘언제나 아이처럼 웃’고 웃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에게 마음과 감정이 있는 이상, 시는 인간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따뜻한 위로를 건네기 위해 늘 우리 곁에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스스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면 세상을 인식할 수 없고, 내 옆의 사람을 돌아보지 못하고, 또 이해하지 못하고, 그렇게 되면 결국엔 인간 존재로서의 삶의 방식과 의미를 찾기 힘들어지지 않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