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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경 Apr 09. 2024

학교는 아이들이 백 번 실수해도 괜찮은 놀이터

서평『학교는 시장이 아니다』, 마사 누스바움 지음,  우석영





 교육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일까? 


  누스바움은 해당 책에서 예술과 인문학 대신 경제성장과 개인의 성공을 더 중시하는 현대의 교육 방식을 문제삼으며, 교육의 본질적인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다. “교육은 사람을 위한 것이다.” (61) 라고 하지만, 현재 한국사회의 고등교육은 모두 목적 기반의 교육을 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입시를 위한, 취업을 위한, 그렇게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도구가 되기 위한 목적을 위한 교육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는 타인에 공감하는 법을 배우고, 도덕적 감정을 길러 시민의식을 갖는 법을 배우고,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사실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보는 법을 배우고, 또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여 협동하는 법도 배워나가며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비로소 조금씩 성장해나갈 수 있다. 목적이나 능력에 의한 도구가 아니라, 존재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민주주의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정당하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애를 쓸 수 있는 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성장주의적 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은 - 누스바움이 주장하는 배움의 덕목 중 하나인- 호기심과 경이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라 본다. 그리고 그 이유는 우리나라의 지나친 성과주의적 교육이 아이들에게 실패를 무서워하게끔 만들어서, 아예 배움에 흥미조차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학생들에게 실패하는 법은 가르치지 않는다. 영어학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인상적이었던 점 중 하나가, 학생들이 간단하게 보는 영어시험에서도 그저 한 문제라도 틀리지 않기 위해 컨닝을 서슴치 않는 반면 진정 틀린 단어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배우려고는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기껏해야 학원에서 간이로 보는 단어 시험에서 몇 문제 틀리는 건데 ‘많이 틀리면 어떡해요?’하고 걱정하는 학생들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틀린 거는 고치고 다시 공부하면 되지.’ 뿐이었다. 그리고 문득 교환학생 시절에 들었던 한 가지 의문점이 생각났다. ‘우리나라는 돈을 내고서라도 더 질 좋은 교육을 받고, 더 많은 교육을 받고자 혈안이 되어 있는데, 노르웨이는 심지어 돈을 받아가면서 교육을 받는데… 국가의 경제력 차이가 결국은 공부환경의 차이를 만들고, 이게 더 나아가 학생들의 면학 분위기까지 바꾸는 게 아닐까?’ 


  앞서 언급한 것처럼 노르웨이의 교육은 무상이다. 심지어 대학생들은 나라에서 공부 열심히 하라고 주는 지원금까지 넉넉하게 받을 수 있다. 물론 학력에 따라 직업을 가지는 데 제한이 있을 수는 있지만, 대학에 가는 게 모두의 인생의 목적이 아닐 뿐더러 직업 학교에 가서 18살부터 커리어를 시작하는 친구들도 꽤나 많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교환학생을 하며 만났던 친구들은 공부를 하는 데 꽤나 진지했고 대체로 수업에 꽤나 적극적이었다. 물론 그들도 같은 사람인지라, 무조건적으로 그들이 더 우월한 교육을 받고 수업태도가 좋았다고 박수만을 쳐주기에는 무리가 있다. 


  다만, 한국의 대학 수업 교실에서 교수님이 질문했을 때 강의실에 흐르던 정적과 노르웨이에서 교수님이 그저 렉쳐 수업을 하고 있는데, 이에 손을 들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문점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던 능동적인 학생들의 모습 간에는 분명 차이점이 있었다. 틀리는 것이 무서운 한국 학생들과,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한 노르웨이 학생들 간의 태도의 차이가 교실에서부터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줄세우기식 교육과 사회에 도구적 쓸모로서의 쓰임만 강조하는 교실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틀리는 것아 곧 자존감, 자아정체감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고 보고, 이러한 능력지상주의적 시각이야말로 교실에서 배제되어야 할 가장 위험한 태도가 아닐까 생각했다.


 누스바움은 이 책에서 놀이를 통해 아이들에게 공감 교육을 하고 예술을 통해 창의력을 증진시키는 활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적 지식과 논리적 지식 이외에도 서사적 상상력을 통해 그 두 가지를 연결하고 적용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놀이를 통해 갖는 공감 교육의 중요성은 점차 개인주의화 되어가는 한국사회에서 아마도 더 비중이 늘어나지 않을까 생각하는 바이기도 하다. 최근 급증하는 수많은 혐오범죄들과 직장이나 집단 내 세대 갈등 문제의 심화, 교내 학교폭력 문제의 심화 등 당장 생각나는 몇 가지 한국 사회의 문제적 사건들만 떠올려봐도 당장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대 능력이 부족한 것과 연관지어 볼 수 있는 문제들이다. 누스바움은 타인에 진정 관심을 기울이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 아이들이 스스로 일 처리를 잘 할 수 있어서 먼저는 타인으로부터 독립을 해야만 하고, 그리고 이후에는 연대를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타인에 대해 진심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필수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조건은 루소가 강조했듯 일정한 실제적. 실용적 [사물 처리] 능력이다. 즉 스스로 일 처리를 할 줄 아는 어린아이는 타인을 자신의 노예로 삼을 필요가 없으며, 점차 성숙해가는 육체 능력은 으레 어린이가 타인에 대한 자기도취적 의존에서 벗어나게 한다.” (P.163)


 그리고 두 번째로는, 우리나라에 현재 만연한 타인에 대한 분노, 무관심, 그리고 점차 개인주의화 되는 경향에 비춰 볼 때 민주사회에 우리가 한 시민으로서, 타인과 더불어 연대하며 살아가는 삶의 중요성을 얘기하는 대목이다. 

 “두번째 필수 조건은 앞서 내가 혐오감과 수치심에 대해 논의할 때 강조했던 것으로, [외부 세계에 대한] 완전한 통제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점, 우리 모두가 약점을 지닌 이들이며 서로가 서로를 돕는 길을 찾아야 함을 인식하는 일이다.” (p.163)

 이처럼 누스바움은 내가 그동안 받아왔던 “성장주의”, “능력주의” 교육보다도 인간으로서 삶을 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함양과 조건들은 무엇인가 생각하게 만들었다. 



   다시한번 노르웨이에서의 경험이 나에게 인생에 대한 공부였다고 가정했을 때 나의 얘기들을 몇 글자 더 적어보며 마무리하겠다. 첫째, 다양한 인종과 사람들 사이에서 나의 존재는 유일했고, 이에 줄 세우기식으로 너무나도 쉽게 비교됐던 한국에서의 또래들과 달리, 나 자신과의 비교대상이 없어지자 나는 나 스스로 온전한 내가 될 수 있었다. 물론 그 안에서의 인종 간 차별 문제 등은 언급하지 않겠지만, 나는 인종과 배경의 다양성 속에서 비로소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해방되어 타인에게 진정한 관심을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둘째, 아주 사소한 일상의 작은 것들도 나에게는 어려운 것들이 많았는데, 이에 대한 도움을 요청해야만 살아갈 수 있었고, 그래서 또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나도 또 도움을 주는 관계들이 아주 많았다. 우리는 절대로 혼자서만 잘 살아갈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인간이 자신의 인생을 더 행복하게 만들고 싶다면 나는 더 많은 모험과 도전을 통해 ‘헉!’ 하는 순간을 자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새로운 영역에 대한 탐구,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 나와 다른 어떤 것에 대한 관심, 이를 받아들일 줄 아는 열린 마음에서 온다.  


“놀이는 사람들에게 타인을 지배하지 않고 타인과 함께 살 수 있는 능력을 가르친다. 놀이는 취약함과 놀람과 관계되는 경험을 호기심과 경이에 연결시킨다.” (P.169) 


즉, 학교가 시장이 아니라 배움의 놀이터가 된다면, 아마도 실패하겠지만 계속해서 부딪히고 탐구하고 그렇게 진정으로 뭔가를 배우고, 그 안에서 공감능력을 기르고, 타인과 연대하며 살아가는 법을 익히고, 공감능력을 함양하고, 배운 것에 대해 감탄하고 경이를 가지고 인생을 더 풍족하게 만드는 법에 대해 알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학교는 자주 가고 싶은 놀이터가 되었으면 좋겠고, 그 안에서의 교육은 본질적으로 ‘인간’을 위한 교육이었으면 하고, 또 배움에 있어서 틀리는 것이 무섭지 않은 교실이 되었으면 좋겠다. 학교에서 자주 실패하는 경험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성찰 능력이 있는 사람이야말로 사회에 나갈 준비가 된 사람이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다소 모순되지만, 책을 읽으면서도 이를 내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고, 이 글이 실패할까 두려워 또 작성하는데 시간도 오래 걸렸다. 읽는 과정에서도 필자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비판적인 사고와 더불어 책을 읽어나갔는지는 의문이다. 교육을 받으면서 동시에 교육에 대해 생각해보기란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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