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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경 Apr 10. 2024

재능은 선물이며, 선물 교환은 가치 증식의 핵심

서평 『선물』, 루이스 하이드 지음, 전병근 번역, 도서출판 유유

구글에 'gift' 단어 뜻을 검색했을 때 나오는 두 가지 의미



   해당 책의 원제는 영어단어 ‘Gift’라고 한다. ‘선물’이기도, ‘재능’이기도 한 이 단어는, 제목처럼 단 4개의 알파벳만으로 이 책의 주제를 크게 함축하고 있다. 대가없이 주어진 ‘재능’을 공동체에 나누어져야 할 ‘선물’으로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이 나타나있기 때문이다. 흔히들 누군가 재능이 있을 땐, ‘넌 타고났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그 재능은 어떤 식으로 소비되고 공유될까?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기 때문에 재능은 ‘나의 소유물’인 걸까?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종류의 재능은 수익화되고 상업화되기 일쑤이며, 이윤이 우선시되는 시스템의 일부가 되곤 한다. 이 책은 예술 작품에 대해 우리 사회에서 예술이 어떻게 소비되고 공유되는지 논의한다. 뉴기니 동쪽 끝의 마심족의 선물 교환 순환 ‘쿨라’, 마오리족의 선물 순환의 정신 ‘하우’, 그리고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민간 설화 등을 통해 사회를 지탱하는 또 다른 힘인, ‘재능(gift)’의 의미를 재정립하는 것이다. 



  먼저, 이 책은 ‘gift’의 '재능'이 어떻게 '선물'로 연결될 수 있는지 설명하며 자연스럽게 저자의 의견을 시사한다. 그는 ‘선물’이란, ‘살 수 없는 것’이라며, 자신의 의지에 따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말했다. (31) 실은 말이 되는 이야기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노력하는 사람은 재능있는 사람을 이기기 쉽지 않다. 재능이 경쟁력이 되는 시대에 참으로 위로가 되는 지점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여기서 또 다시 한번 저자는 ‘인디언식 증여자’라는 개념을 소개하며, 왜 재능이 선물이 되어야만 하는지 그 당위성을 주장한다. 선물의 ‘이동성’이라는 고유의 성질이, 선물이 늘 소비되고 늘 사용되게끔 만든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다시한번 예술작품이나 현대 사회에서의 재능을 바라보는 관점에 의문을 제기한다. 



 저자는 이를 원의 형상으로 소개한다. 선물이 ‘소비’된다는 것은 어느 한 쪽에 소유물이 된다기보다는 ‘늘 움직이면서 무엇이든 다시 줘버리는 것’(47)에 더 가까운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선물은 ‘순환’하고, ‘사용하는데에 가치가 발생’하는 재산이 된다. 흥미로웠던 부분은, 인디언식 증여자라는 개념도 그렇고,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읽어왔던 동화나 민간 설화에서도 이런 개념이 녹아들어 있었다는 점이다. 마치 ‘인과응보’라는 사자성어나 인도의 ‘카르마’라는 개념이 연상되기도 하지만, 결국엔 아주 오래 전부터 인류는 이 ‘선물의 순환’이라는 개념을 알고 있었다는 점을 시사하는 듯 하다. 


만족은 ‘채워진 상태’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그치지 않을 흐름으로 채워지는 상태’에서도 나온다. 사랑에 빠졌을 때처럼 우리의 만족감은 편안한 상태가 된다. 어떻게든 선물을 사용하는 것이 동시에 선물의 풍요로움을 보장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80)

 

 그렇다면 우리는 왜 현대사회에서 다시 인디언 원주민들이 이야기하던 ‘선물’의 개념을 상기해야 할까? 재능은 무엇을 위해 순환되어야만 하고, 나누어져야만 하는 것일까? 위의 인용문을 살펴보면, 인간에게 선물은 ‘그치지 않을 흐름’으로써 만족감과 평안을 제공한다. 더 많이 가진다고 해서 더 행복한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는 선물을 결국 주고 받음으로써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뜻이다. ‘나’가 아닌, ‘우리’를 위해, 그리고 가치의 극대화를 위해서이다. 



  저자는 물질적인 것들 이외에도, 특히나 예술가의 재능, 그리고 창작물까지 저는 ‘대가 없이 주고 받는’ 선물 순환을 통해 가치 창출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선물 교환을 ‘에로틱’(79)하다고 표현한 부분이 참 인상적이었다. 마치 사랑에 빠졌을 때처럼 편안한 상태가 되는 만족감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한 ‘편안한’이라는 말이 괜스레 크고 강하게 들렸다. 아무래도 이는 예술을 통해 사유 재산을 늘리고 본인의 가치값만을 올리기 위해 경쟁적으로 행동하기보다는, 오히려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큰 지지자가 될 수 있는 환경을 전제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SNS에 업로드했던 콘텐츠 일부

  나의 재능은 무엇일까, 최근 대학교 5학년을 맞이하며 진지하게 고민을 시작했었다. 내가 사회에 환원할 수 있고, 제공할 수 있는 가치는 무엇일까, 고민했을 때 스스로가 잘하는 것은 아무래도 학교 공부를 어느 정도 할 수 있다는 점 정도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제, 약 5년 전에 잠시 스쳤던 동아리 지인에게 손편지를 받았다. 요 근래에 실은 SNS에 내 근황을 자주 업로드했는데, 이를 본 지인이 손 편지를 써준 것이었다. 내용은, 내가 소셜 미디어에 업로드하는 나의 이야기, 나의 그림, 그리고 내 목소리로 나레이션한 콘텐츠를 보고 감동을 받았고 팬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단정한 손글씨체로 빼곡히 손글씨로 적혀있는 편지지에는 ‘멋있다’는 말, 그리고 ‘위로’를 받았다는 말, ‘감동’을 받았다는 말 등 온갖 긍정적인 영향력들이 적혀 있었다. 휘트먼의 말마따나, 우리가 귀중하게 여기는 작품은 영혼을 되살리는 힘이 있는 것이 맞는가보다. (내가 예술가라는 말은 아니지만!) 이 편지를 읽음으로써 나 또한 생명력과 동기부여를 받았다. 특히나 편안한 상태의 만족감(80)을 여기서 가장 많이 느꼈던 듯 하다. 



  영혼을 치유하는 예술작품은 상품보다는 선물이라고 불리는 것이 맞을 것이다. 또, 영혼에 깃들어있던 무기력을 사라지게 (87) 하며, 교환됨으로써 더 가치가 증폭되는 선물은 사실상 우리 모두에게 이로운 것이다. 왜냐하면 선물은 위로 향하는 힘, 즉 자연과 영혼과 집단의 선의 또는 비르투를 선사하기 때문이다. (87) 재능이 나누어짐으로써 단 한 명이라도 영혼을 정화하고, 이로인해 유기적 증식이 계속될 수 있다면, 실은 ‘why not?’을 외쳐야 할 듯 하다. 그 동안 부끄럽다며 더 이상 업로드하기를 멈추었던 영상 같은 것들에 말이다. 선물이 자라나서 모두에게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행복감을 선사할 수 있기를 바라보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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