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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경 Apr 14. 2024

신실하고 고결한 밤

서평) 『신실하고 고결한 밤』, 루이즈 글릭 지음, 정은귀 옮김, 시공사




상실은 정말 상실인가? 결핍은 정말 부족함이고, 이별은 정말 이별인가? 더 나아가, 마이너스(-)는 정말로 존재(+)의 소멸(0)인가? 그렇게 질문하며 상실로 인한 아픔을 치유하는 시집이다.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느껴졌다. 상실과 죽음을 마주하면서 시인은 그 감정을 산문의 형태로, 그러나 산발적인 단어들로 표현했다. 그래서인지 활자를 읽으면서도 그 상황의 감정을 이미지적으로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릴 수 있었던 듯하다. 다만, 그 고통스럽고 힘겨운 상황들에 화자의 감정은 절제되어 있는 편이라, 오히려 독자들에게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이를 다루는 법에 대해 넌지시 제시하는 것 같다 생각했다. 



  <우울한 조수>는 공감이 가장 많이 되는 시였다. 친할머니께서는 우울증을 앓고 계시는데, 종종 본인께서는 이제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사회에 역할을 다하지 못하신다는 것에 매우 우울해하셨다. 늘 그렇지 않다고, 쓸모보다는 밖에 나가서 봄 날씨도 즐기시고 하루하루 즐겁게 보내셨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리면서, 정작 나도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사회 구성원으로 쓸모를 다하고자 하는 취업이라는 과정을 준비하면서는 불가피한 생각인 듯 하기 때문이다. 시 속에서 조수는 묻는다. ‘저는 이제 선생님께 아무 쓸모가 없어요: 나를 쫓아내세요. (69)’ 그의 쓸모는 답장이 필요한 이들에게 답하는 일이었고, 또 조수는 화자의 서명 아래 자신의 이니셜을 표시하는 일에 엄청난 자부심을 느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여전히 그는 망설였다. 

선생님 인생이 부러워요, 그가 말했다. 

제가 울 때 저는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요?

그래서 내가 말했다, 나의 날들이 얼마나 공허한지 생각해 보라고, 

또 끝이 보이는 시간에 대해서도, 

또 내 성취의 무의미함에 대해서도, 

                                 <우울한 조수 중> 



 할머니도, 나도, 우리는 왜 쓸모에 집착하는 것일까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문득 우울한 조수가 ‘그런 격식’(69)에 자부심을 느꼈다고 했던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표면의 변화들’ (71)은 실은 우리가 늘 보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 너머에 공허한 마음들까지 보기는 쉽지 않다. 특히나 이번에 인턴십을 하면서도 나 역시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사원증을 목에 메고 출퇴근을 하면서 이 카드 하나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학업과 이를 병행하는 일상, 그리고 체험형 인턴십이 끝나면 다시 시작될 취업 준비. 그 현실적인 문제들까지 ‘사원증’이 가려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또 그 표면에 마음을 빼앗기고 방향을 잃어버릴 수도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오른쪽 팔을 잃고, 자아의 죽음을 맞이하는 화자의 심경이 표현된 <다가오는 지평선>은 나에게 두번째로 인상적인 시였다. 그림을 그리는 화자에게 오른쪽 팔은 목숨줄과도 같았다. 그런 그가, 반복되는 통증 끝에 끝내 팔의 감각을 상실하고 만다. ‘느낌이 떠나갔다-’ (76)며 그는 이를 ‘비문’이라고 표현하는데, 묘비를 암시하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마치 스스로가 죽음을 맞이하면서 느끼는 바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는 심박측정기로 추정되는 기계에 대해 ‘자장가 부르는 사람의 목소리처럼/ 부드럽게 상승하고 하강하는/ 그 불안정한 선.’ (77)이라고 설명하는데, 이는 죽음을 마치 어린아이가 잠에 드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또 어찌보면 잠에 들어야 하는 어린아이에게 누군가 성숙한 어른이 잠을 의무적으로 ‘재우기 위해’ 하는 행위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마치 누구나 때가 되면 맞이해야 하는 ‘의식’처럼 죽음이 묘사된 것 같다 생각했다. 


  이후 다음 연에서 그의 심장이 멈추는 순간, 그는 자장가를 부르는 사람의 ‘소리’(77)가 잦아들고 있다고 표현한다. 또한 ‘영혼이 무한과 합쳐질 때, 무한은 / 직선으로 재현된다./ 마이너스 기호처럼’ (77) 이라 말하며 심장박동이 멈춘 측정기의 그래프를 시각적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심장의 멎음, 죽음, 긴 잠을 뜻하는 마이너스 기호는 여기서 그가 말하는 지평선이면서 동시에 무한이기도 하다. 깊은 잠에 빠져서 더 이상 자장가가 들리지 않는 순간, 우리가 무한한 세계로 들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신실하고 고결한 밤>에서도 ‘무한한 끝들’(29)이 있다는 표현이 나온다. 시인은 아무래도 죽음이 끝이 아니고, 우리가 자유롭게 꿈을 꾸는 것처럼 무한하다고 바라본 게 아닐까 싶었다. 



이쯤에서 나 생각하네, 너를 떠나야겠다고. 보자하니

완벽한 끝은 없는 것 같아. 

사실, 무한한 끝들이 있지. 

아니면 일단 누군가 시작하면,

다만 끝이 있을 뿐. 

<우울한 조수 중> 中



  상실은 정말 상실인가? 결핍은 정말 부족함이고, 이별은 정말 이별인가? 더 나아가, 마이너스(-)는 정말로 존재(+)의 소멸(0)인가? 할머니와 이별하고나서 나는 부쩍 할머니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었다. 내가 모르는 시절의 할머니의 모습도 상상해보고, 엄마와의 관계 속에서 할머니의 모습도 상상해보았다. 한 인간으로써의 할머니의 삶은 어땠을까 상상해보면서 나는 오히려 내 마음 속 한 켠에 할머니가 더 선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인턴십이 끝나면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겠지만, 내가 회사생활을 하며 얻은 경험과 인간관계는 마이너스로 소멸되지 않을 것이다. 경험, 시간, 추억, 우정, 사랑, 함께 보내는 시간들, 점심시간에 나누는 미소와 같은 것들이 우리 삶에 의미를 더해주는 것이 아닐까. 소멸은 정말 소멸이 아니고, 상실은 정말 상실이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은 내 마음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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