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허진 옮김, 다산책방, 2023)
소설 <맡겨진 소녀 (Foster)>
2009년 데이비 번스 문학상 수상
<<타임스>> 선정 21세기 출간된 최고의 소설 50권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NPR 선정 최고의 책
영화 <말없는 소녀 (The Quiet Girl)>
제 7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2관왕
전세계 최다 관객상 수상
제 95회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장편영화상 최종후보
사랑은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 책과 영화 전반에 고요하게 자리잡은 침묵 속에서, 순간 벅차올랐던 다정함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계속 났던 작품이었다. 1981년 아일랜드의 시골 지역으로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몇 달 동안 친척 집에 ‘맡겨진’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다. 조용한 소녀에게 침묵이란, 자신을 현실에서 도피하게도 만들고, 혹은 상황을 관찰하게도 만든다. 그리하여 작가는, 그리고 영화는 오감을 모두 활용하여 코오트라는 이름의 소녀와 그 세상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차창 밖에 드리운 나무와 그 그림자, 물을 떠서 올릴 때 생기는 보드라운 파동, 아침마다 작게 들리는 라디오의 방송 소리 등. 사소하고 일상적이지만 말없는 순간들이 세로운 언어로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책과 소설의 공통점은 말하지 않고 보여준다는 점에 있었다. 단어와 단어 사이의 여백을 독자들이 채우게 만들고, 오히려 읽는 자로 하여금 더 많은 것을 보게 했다. 9살 소녀가 받아들이는 새로운 자극들이 영화의 느긋한 속도, 사물에 천천히 줌인되는 화면을 통해 전해졌기 때문이다. 느리게, 하지만 강하게 영향을 미치는 사소한 일상의 순간들. 예를 들어 뜨거운 욕조에 처음 발을 담갔던 순간, 아줌마가 백까지 세면서 머리를 빗어주던 순간, 장례식장에서 아저씨가 컵에 따뜻한 차를 따라주었던 순간들이 그렇다. 주고 받은 말들은 보이스오버로 전해지고, 대신 화면은 동그란 컵에 졸졸졸 채워지는 붉은 차를 클로즈업해서 찬찬히 보여주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들을 수 있는 메시지가 그 모든 장면에 담겨 있었다.
아주머니의 손은 엄마 손 같은데 거기엔 또 다른 것, 내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불러야 할 지 모르겠는 것도 있다. 나는 정말 적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지만 여기는 새로운 곳이라서 새로운 말이 필요하다. (24-25)
소녀의 천진난만한 생각들은 직접적이지 않아서 더 직접적이었다. 작가는 한번도 아이의 상황이나 심리를 명확하게 설명한 적이 없지만, 오히려 함축적인 방식으로 아이의 감정을 독자들이 직접 느끼게 했다.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 아빠가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 들지 않게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힘든 기분이지만 걸어가다 보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70)
예를 들어, 킨셀라 아저씨가 책에서 처음 손을 잡았을 때도 작가는 소녀가 어땠다고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보다 오히려 소녀가 낯선 감정에 놀란 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아저씨가 자신과 맞춰 걸을 수 있도록 발을 맞춰 주었다고 담담히 묘사한다. 투박한 듯 하지만 섬세하게 계속해서 아이를 신경쓰고 있는 어른으로써의 킨셀라 아저씨 역시 섬세하게 다가오는 대목이었다.
영화도 그렇다. 모든 씬이 철저히 1인칭(소녀) 시점인 것, 안정적인 화면 구도에 느린 컷편집 속도, 아름다운 아일랜드 시골 마을의 평화로운 모습, 식탁에서 세 사람의 말없는 조용한 식사, 노랗고 따뜻한 집 안의 벽지와 부드럽고 여린 아주머니 역할 배우의 목소리, 그런 배경과 연출에 어울리는 클래식한 느낌의 음악까지.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여백을 독자가 직접 채워넣어야 했던 소설의 특징을 영화가 영화만이 가진 특징으로 잘 살려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도, 몽타주도, 적절한 곳에 삽입된 보이스오버도, 두 집의 시각적 차이도, 아이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어른들의 뒷모습들도. 소설의 함축성이 영화적인 방식으로,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담겨 있었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사랑을 배웠던 소녀, 세 사람은 이별의 순간 무슨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무거워진 공기를 모두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침묵이 지속되면서 마지막에 소녀가 내뱉은 두 글자의 밀도가 갑자기 높아졌었던 듯 하다. 이때 인상적이었던 건,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98) 라고 번역된 마지막 문장이었다. 서로를 껴안고 있는 아저씨와 소녀, 소녀의 정면으로 다가오고 있는 친아빠를 아저씨는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호칭’을 통해 두 상황을 암시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빠...아빠."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오솔길을 따라 밭을 다시 지나올 때 내가 아주머니의 균형을 잡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없으면 아주머니는 분명 넘어질 것이다. 내가 없을 때는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다가 평소에는 틀림없이 양동이를 두 개 가져왔겠다는 결론을 내린다. 나는 이런 기분들을 또 언제 느꼈었는지 기억하려 애쓰지만 그랬던 때가 생각나지 않아서 슬프기도 하고, 기억할 수 없어 행복하기도 하다. (31)
소설을 읽으며 루시모드 몽고메리의 <빨간 머리 앤>이라는 작품이 떠올랐었다. 고아원 신분으로 낯선 동네에 입양이 되어 살게 된 앤, 그리고 그녀에게 진정한 가족이 되어 준 커스버트 남매까지.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우정과 사랑의 방식과 많이 닮아있다고 느껴졌다. 앤 역시 소설 속에서 외로웠던 커스버트 남매의 생활에 활력을 주는 것 이상의 존재였는데, 코오트와 먼 친척 부부가 서로를 사랑하는 방식 역시 서로가 서로의 균형을 맞춰주는 방식으로 묘사되어 좋았다. 아들을 사고로 잃은 부부에게 양동이 하나 만큼의 힘으로 함께 걸어줄 만큼. 이렇듯, 여백과 묘사 속에서 찬찬히 음미하며 읽다보니 나도 모르게 어느새 아일랜드 시골 마을에 다녀온 듯 했다. 침묵의 힘을 배우려 언제고 다시 꺼내보고 싶은, 얇지만 아주 두꺼운 소설이었던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