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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경 Jul 13. 2024

주황머리 소녀들

탈색한 취업준비생


5시간 동안 미용실에 가만히 앉아있기. 고문이 따로 없었다. 오전 10시 반 쯤 들어갔던 미용실에서 오후 3시에야 나오니 해는 이미 가장 뜨거운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그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이는 형광빛 주황머리. 길을 걷는 나는 똑같은 나인데, 가끔 길을 걷다 보이는 거울 속에는 낯선 내 모습이 보인다. 처음으로 곱슬거리는 숱많은 나의 검은 생머리에서 색을 빼보았다. 그 전날 예약을 하고 바로 실행에 옮긴 것이다. 요즘 난, 정말이지 충동성향의 극단을 보여주고 있다.


파격적인 시도를 한 이유는 간단했다. 우울감에 사로잡혀 내 방문 앞에 한 발자국 내딛는 것도 힘들었던 나는 변화가 필요했다. 속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내 능력을 깎아내리고, 스스로가 가치 없는 인간이라 되뇌이고 있었다. 취업 준비를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면서 또 게으른 나의 모습을 스스로 평가절하하는 이 무한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운동을 하기는 커녕,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는 것조차 용기를 내야 하는 상황에서 이 굴레를 탈피할 수 있는 방법이란 사실 한정적이다. 그렇게 나는 강력하지만 즉각적인 변화를 줄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았다. 그렇게, 이 돈으로 상담을 받거나 이 돈으로 다른 것을 할 수도 있었음에도, 나는 굳이 탈색과 염색을 감행했다.  


나에게 빨간머리란 내 유년기의 아이콘과도 같다. 어렸을 때는 20년 후 내 모습을 상상해서 그릴 때 무조건 빨간 머리의 내 모습을 그리곤 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너무나도 사랑했던 '빨간머리앤', 디즈니의 '인어공주', 그리고 픽사의 '메리다' 공주, 슈가슈가룬의 '쇼콜라' 등과 같은 캐릭터들 때문인 듯 하다. 그들은 모두가 붉은 머리를 지닌, 당차고 사랑스러운 소녀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모든 캐릭터들을 너무나도 사랑했고, 애정했고, 이 캐릭터들처럼 되고 싶어서 몇 번이고 TV속으로, 만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곤 했다.



  캐릭터들 라인업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듯, 내가 사랑했던 캐릭터들은 기존의 관행이나 전형적인 틀에 반항을 하면서 또 자신만의 인생을 개척해나가는 당찬 인물들이었다. 심지어 그 시절 디즈니 공주인 인어공주 에리얼마저도 바다 왕자와의 혼인 날 아빠 말을 거역한다. 게다가 바다 마녀와 거래를 해서 자기 다리를 담보로 삼아 육지로 나가 버리기까지 한다. 메리다 공주는 전형적인 미인 상이 아니라, 주근깨있는 얼굴에 엄청난 곱슬머리를 가졌다. 하지만 다른 나라 왕자들보다도 활솜씨가 뛰어나고, 솔직하고 당찬 매력을 지녔다. 슈가슈가룬의 '쇼콜라' 마녀도 엉뚱하고 발랄하지만 역시나 솔직하고, 의욕이 많은 인물이라 도전을 멈추지 않는 캐릭터다.




   

  과감하게 주황색 머리로 염색을 한 이유는 그렇다. 어렸을 때의 나로 돌아가 내 마음을 조금이나마 토닥여주는 것. 지금의 내 모습을 스스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또 오히려 조금은 걱정을 덜고 현재를 조금 더 가볍게 살아줬으면 하는 나의 마음. 불안이 없는 생활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즐기면서 살아가기 위해 가벼운 마음가짐을 지녔으면 좋겠다.


  주황머리가 된 나는 여전히 카페에 와서 자기소개서를 쓰고, 채용 공고를 하루에도 몇 십번씩 들여다 본다. 가장 싼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밥값이 없어 밥 시간에는 집으로 돌아온다. 지금 당장은 이렇게 살더라도, 바뀐 내 머리로 자신감 하나 충전했다. 그렇게 취준생인 나는 주황머리가 되었다.


(면접을 볼 일이 생길까?라는 생각으로 가발을 알아보고 있다. 참으로 대책없이 한 염색이다. 그래도 내가 다시 밖으로 나오게 됐으니,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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