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아주 특별한 아홉 번째 취미 _종이접기
그 남자, 지하철에 앉아 헝클어진 머리를 큰 손으로 넘겨 정리한다. 갑자기 가방에 손을 뻗더니 알록달록한 색종이를 꺼내 슥슥 접어 토끼를 만든다. 훅 공기를 불어 넣어 탱탱한 토끼가 귀엽다.
그 여자, 다리를 꼬고 카페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하다. 시계를 한 번 보더니 다이어리에서 파란색 종이를 꺼내 무언가에 열중한다. 도라에몽이 완성됐다. 보통내기가 아니다.
조각조각 남겨진 시간조차 무심히 스쳐 보내지 않고, 종이를 접는 이들, 섹시하다.
여기까지 제목과 도입부를 보시고 움찔하신 분들이 계실 수도 있을 텐데요, "순수와 동심의 상징인 종이접기를 보고 섹시하다니, 이 사람 마음이 썩었구먼!'이라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진지합니다. 종이접기를 하는 사람은, 섹시합니다. (심각) 이번 글에서는 종이접기라는, 색다른 섹시함을 감춘 취미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종이접기의 섹시함에 눈을 뜬 건 중학생 시절, 한창 유행하던 인터넷 소설을 볼 때였습니다. 잘생기고 싸움도 잘하고 머리도 좋은, 그야말로 소설 속 주인공 같은 남자들이 (실제로 소설 속 주인공들이죠) 평범한 여주인공과 온갖 치정에 휘말려 로맨틱한 나날을 보낸다는, 유치하고 진부한 스토리를 가진 인터넷 소설들은, 소녀들에게는 환상 그 자체였죠. 저 역시 한 명의 소녀로서, 당시 유행하는 인터넷 소설 (약칭 '인소')를 즐겨 읽었습니다. 그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었는데요, 약속 시간에 늦은 여주인공이 헐레벌떡 뛰어가 보니, 여주인공을 기다리던 우리의 까칠하고 잘생긴 남주인공이 앞에 있던 냅킨으로 종이접기를 하고 있던 장면이었습니다. 학, 토끼, 개구리 등 다양한 동물들을 접어 놓은 그 행태에, 저는 묘한 두근거림을 느꼈습니다. 뭐지? 굉장히 안 어울리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마음이 뛰어!! 그때의 저는 어려서 몰랐던 거죠. 진정한 섹시함을. 이해는 할 수 없었지만, 그때의 묘한 떨림은 늘 제 머릿속 한구석에 남아 훗날 제가 종이접기의 숨겨진 매력을 발견하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제 저는 그때의 떨림이 무엇 때문인지, 서툴게나마 글로 표현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왜 저는 종이접기에서 묘한 섹시함을 느끼는 걸까요? 대답은 바로, 종이접기라는 어릴 적 했던 놀이의 예술성과 단순함, 그리고 일상 속에 조각조각 존재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흘려보내는 시간의 조화에 있습니다. 써놓고 나니, 말이 조금 복잡해서 이해하기 힘든 감이 있는 데요, 차근차근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거의 누구나가, 어릴 적 학교에서 종이접기를 해 본 경험이 있을 거예요. 미술 시간,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네모 모양으로, 세모 모양으로 차근차근 접다 보면, 정사각형의 색종이가 어느새 토끼로 변해 있는 모습에 신기함과 동시에 뿌듯함을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쉬는 시간에는 개구리를 접어서 개구리 싸움을 붙이기도 했고요, 남자 아이들은 딱지를 접어 퍽 퍽 소리가 나도록 딱지를 치곤 했지요. 여자 아이들은 열심히 학이나 별을 접어, 좋아하는 아이에게 수줍게 천 마리 학을 전해주거나, 친구들의 생일 때 종이별을 한가득 예쁜 통에 넣어 건네주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지금도 떠올리면 아련한 우리의 어린 시절에는, 종이 접기가 있었습니다. 종이를 접는 모습을 보자면, 그 당시의 순수함과, 즐거웠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어떻게 보면, 동심과 가장 가깝게 맞닿아 있는 취미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종이 접기는 단순히 "어린 시절 했던 놀이"라고만 수식어를 붙이기에는 아쉬운, 예술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저 단순한 종이에 불과했던 재료에 나만의 상상과 미의식을 덧붙여, 하나의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 낸다는 차원에서, 종이접기는 확실히 하나의 예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종이접기를 전문으로 하는 분들이 만든 작품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지는 작품들도 많답니다. 회화가 연필과 붓, 물감으로 내 안의 상상과 주제를 실현시키는 과정이라면, 종이접기는 종이를 통해 전하고 싶은 바를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작업인 거죠. 야무지게 꼼꼼히 종이를 접고 피며 최종 작품을 완성해 가는 모습에서는, 일종의 신성함마저 느껴집니다.
종이접기에는 이렇게 모순되는 듯한 매력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진지하고 심오한 예술과 어릴 적 쉽고 간단하게 했던 놀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특징이 혼합되어, 오묘한 매력을 자아 내지요. 그래서 저는 종이접기를 하는 이들에게서, 어릴 적의 순수함을 그대로 간직한 티 없는 모습과, 내 안의 생각을 창작하고 표현하려는 진지한 모습을 동시에 발견하고는, 그 알 수 없는 긴장과 불안에 묘하게 매혹됩니다. 사람들은 모순된 것에서 불안함과 위험을 감지하며, 아이러니하게도 그 위험과 불안함에 스릴과 매력을 느낀다고 하잖아요? 츤데레, 청순글래머 등 모순적인 이미지가 결합된 단어가 유행하는 것을 보면 나름 설득력 있는 견해이지 않나 싶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흔히 말하는 "남는" 시간에 종이를 접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마음이 끌립니다. 퇴근 길 지하철에서, 약속시간에 먼저 도착했을 때,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며, 우리는 일상에서 딱히 쓸데가 없는 조각조각 난 잉여시간들을 마주치게 되지요. 이런 잉여시간에,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지는 쉽게 짐작이 가실 거예요. 스마트폰이죠. 스마트폰으로 카톡을 하거나, 게임을 하거나, 브런치를 하거나 (ㅎ), 뉴스를 보거나 하며 우리는 필연적으로 찾아 오는 이 시간들을 때우기에 바쁩니다. 하지만 잉여시간이라고 불리며, 모두가 어떻게든 때워 없애려고 하는 이 시간, 종이를 접어 작은 작품을 완성하는 사람들은 이런 잉여시간에서조차, 진정한 여유를 즐깁니다. 필요 없는 시간이라며 어떻게든 흘려 보내고, 없던 걸로 하려던 게 아닌, 주어진 시간을 진정으로 즐기며 여유를 부릴 줄 아는 사람들. 정말 섹시한 삶의 자세입니다.
꼭 남는 시간이 아니더라도, 따로 시간을 내셔서 종이접기를 즐기시는 것도 강력 추천해요. 취향에 맞는 알록달록 다양한 무늬의 색종이를 사셔서 종이접기 책이나,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종이접기 지침을 보며 따라 접다 보면, 세상 만물을 종이로 만드는 재미에 푹 빠지게 되실 거예요. 글이나 그림으로 설명해 놓은 종이접기 지침은 이해하기 어렵다, 싶으시면 유튜브 채널을 적극 이용하시는 걸 권해 드려요! 유튜브에 "종이 접기, " 혹은 "origami"라고 치시면, 다양한 작품을 종이 접기로 완성해가는 모습을 촬영한 영상이 많이 있으니, 직접 보시며 따라 하시면 쉽게 완성하실 수 있을 거예요.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간단하게 배우고, 작품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곤 가끔 시간이 남으면 색종이를 몇 장 챙겨다니다가 꺼내서 어제 배운 걸 복습해 보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