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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탐구토끼 Dec 02. 2015

그래피티, 자유에 취하다

#16 아주 특별한 열여섯번째 취미이야기_그래피티

비가 조금씩 내리던 주말, 젊음과 자유의 거리, 홍대거리에 도착했습니다. 서늘한 날씨에 옷깃을 여미고 터벅터벅 걷는 길, 궂은 날씨에도 활기차게 떠들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묘한 자유로움이 느껴졌습니다. 추적추적한 날씨였지만,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서 가볍게 걸음을 옮기게 되었네요. 오늘 취재가 진행될 장소를 찾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가도 곳곳에 그려진 그래피티에 시선이 멈춥니다. 삐뚜름하게 흩날리는 글씨가 야생적입니다. 몇 분을 걸어서야 드디어 찾고 있던 간판을 발견했습니다.비가 차분하게 어깨를 적시던 이 날 오후, 홍대 T.I.P 아카데미에서 그래피티 아티스트, 닌볼트 (ninbolt) 씨에게 그래피티에 대해 여쭤보았습니다.




그래피티는 거리의 예술, 반항아들의 낙서, 저항정신을 담은 그림운동 등 다양한 수식어가 붙는 장르입니다. 그래피티를 "예술" 로 치부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도 의견이 분분한데요, 그래피티가 미술계 내에서 작품이 미술로 인정되는 공간인 미술관을 벗어난 거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과, 처음 성행할 때, 전철이나 건축물, 다리 등 공공장소에 낙서를 하는 불법적인 행위로 시작했다는 점, 기존 체제에 대한 반항정신을 지닌 장르라는 점 등이 논란의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논란을 모두 제치고, 벽면에 휘갈겨진 그래피티 작품들을 보면 그 자체의 매력에 압도당하게 됩니다. 날 것 그대로의 리듬, 역동성, 자유, 젊음이 그래피티 작품 속에 삐딱하게 살아 숨쉬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내가 살아있노라고 소리치는 듯 합니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의 리듬과 생각, 개성과 유머가 그래피티 안에는 담겨있습니다.

copyright ⓒ NINBOLT

취재를 위해 방문한 T.I.P 아카데미의 한 교실에서, 닌볼트 씨는 학생 한 분과 함께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고 계셨습니다. 어떤 그림인지 살짝 살펴보았더니 벽에 그릴 그래피티 아이디어를 미리 스케치하며 구상하는 중이셨습니다. 제가 신기해하자, 스케치북을 보여주시며 여지껏 그려본 작품 구상안을 보여주셨습니다. 보여주신 스케치북에서는 사실적인 인물 묘사, 그래피티 특유의 춤추는 듯한 글자, 캐릭터 등 다양한 모티브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거칠어 보이는 글자가 가득하지 않을까 하고 막연하게 예상했던 제가 그 다양함에 놀라자, 닌볼트 씨는 그래피티에도 여러 장르가 있다고 가르쳐 주셨답니다. 그래피티를 그린 사람의 이름을  스타일리쉬하게 표현하는 태깅, 동글동글한 거품같은 느낌을 주는 버블,  우리가 흔히 "그래피티" 하면 떠올리는, 야성적이고 개성적으로 글씨를 표현한 와일드 스타일, 입체적인 느낌이 인상적인 3D, 특정한 캐릭터가 들어간 캐릭터 등 그래피티 안에는 실로 다양한 장르가 있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닌볼트 씨가 그린 그래피티 작품 중에서 생생한 입체감이 마치 실물과 같은 실사 그래피티들이 특히 인상적이었답니다.


닌볼트 씨의 개인전시회에서 전시된 작품. copyright ⓒ NINBOLT

닌볼트 씨가 그래피티를 시작하게 된 건 극히 사소한 계기였답니다. 17세의 어느 날 TV 방송을 보던 중, 스프레이 락카로 벽에 무언가를 휘갈기고는 도망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그게 왠지 멋있어 보여서 시작하게 되셨다고 합니다. 그 후 시작한 그래피티에 취해, 이십 년을 훌쩍 넘기며 활동하시다가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고 하네요. 무언가의 시작은, 사실 이렇게 사소한 순간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저도 브런치에서 "탐구토끼" 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우연히 본 지인 분의 포스팅이었던 것처럼,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할 때는 엄청난 사명감이나 계기보다는, 그저 단순한 "멋지다," "나도 해보고 싶다" 라는 감상만으로 충분할 때가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시작은 쉽더라도, 꾸준히 계속하기란 어려운 일이지요. 그래피티의 어떤 점이 닌볼트 씨를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열중하게 했는지 여쭤보았습니다. 닌볼트 씨는 먼저 즉흥성스케일을 그래피티의 가장 큰 매력으로 꼽았습니다. 그래피티는 "그린다" 는 표현보다는 "휘두른다" 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작업입니다. 펜이나 붓이 아닌, 락카를 쥐고 크게 팔을 휘두르며 작품을 완성시켜 나가는 거죠. 그렇기에 그래피티를 그리는 라이터들의 모습에서도 흘러넘치는 역동감과 리듬, 속도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락카는 금방 색이 착색되기 때문에, 이렇게 무아지경으로 팔을 휘두르다 보면 그래피티는 금방 완성됩니다. 즉흥적 충동, 일탈이라는 말과 잘 어울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 완성된 그래피티 작품은 엄청난 스케일을 자랑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벽에 걸린 액자 안이 아닌, 벽그 자체가 주 무대다 보니,  그래피티 작품의 크기도 자연히 커질 수 밖에 없는 듯 합니다. 그렇기에 작품 안에 담긴 라이터의 메시지, 열정, 개성이 관람객들에게 몇 배 더 크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기술을 잘 익히면 선의 굵기도 잘 조절할 수 있어 군데군데 디테일도 살려 멋진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하니, 그리면 그릴 수록 더 멋진 작품을 완성하고자 하는 열망이 커질 것 같습니다. 촥촥 락카를 뿌리며 한 작품 한 작품 완성해 나갈 때마다 스트레스도 풀리고요.


그래피티 작업 중인 닌볼트 씨


닌볼트 씨는 그래피티 작업은 "취하게 되는 과정" 이라고 재미 있게 표현하셨습니다. 락카 냄새에 취하고, 락카를 휘두르며 내 안의 이미지를 분출해내는 해방감에 취하고, 순간에 취하고, 그리고 작품을 완성한 후, 완성된 작품에 취하게 된다는 거죠.

그래피티를 하다 보면 취한다.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는 그래피티를 정식으로 배울 수 있는 정규과정이나 기관이 체계적으로 설립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특히 그래피티 연습할 만한 장소가 마땅치  것도 문제지요. 허락 받지 않고 공공재, 혹은 사유지의 벽이나 굴다리  그래피티를 하는 위는 범죄에 해당하며 처벌을 받게 됩니다. 바로 그렇기에 그래피티를 전문적으로 교육하고 연습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닌볼트 씨는 강조합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래피티를 친숙하게 접할 때, 미국과는 다른 한국의 정서를 그대로 표현하는 코리안 스타일 그래피티 작품들이 탄생하고, 새로운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겠지요.


독학을 하며 익히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그래피티 커뮤니티를 통해 기초적인 기술을 익히고, 인적이 드문 곳에서 나무판에 칠을 하고 그 위에 락카로 연습하며 실력을 키워 나가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지도 받는 것보다는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독학으로 그래피티를 습득하신 분들도 종종 계십니다.


그래피티 작업을 할 때 필수적인 락카는 국산과 외제 제품이 있으며 동서락카와 몬타나 락카가 유명합니다. 이 외에도 다양한 회사에서 락카를 제조하는데, 가격은 대부분 개당 1500원~2000원 사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는 색깔 당 최소 10개 정도의 락카가 필요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드는 비용은 적게는 만원부터 시작해서 많게는 10~20만원 정도라고 측정할 수 있겠지요.  

아이언맨을 표현한 그래피티. copyright NINBOLT


대중문화와 순수예술의 경계를 허무려는 시도가 점차 많아지고 있는 현재, 거리의 정신을 담은 그래피티는 점차 하나의 예술장르로 발전해 나가고 있는 추세입니다. 흥미롭게도 최근 들어, 그래피티를 주제로 한 미술관 전시회가 종종 보입니다. 어찌 보면 역설적인 이 조합은 점점 많은 사람들이 그래피티가 품고 있는 메시지, 강렬한 시각적 효과, 자유롭고 강렬한 개성에 매력을 느낀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그래피티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앞으로도 보다 많은 사람들이 락카를 뿌리며 마음껏 개성과 자유를 분출하고, 더욱 멋지고 새로운 그래피티 작품을 많이 만나보게 되기를 바라며, 오늘 포스팅은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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