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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브리엘의오보에 Sep 03. 2024

지도와 나침반, 거기에 GPS

오늘은 교육조의 목소리로 가볼까 한다. 아빠는 너를 항상 존중하고, 너의 의사에 맞춰 행동하는데 익숙하다. 또한 그러길 바란다. 아빠가 손을 대면 5분에 끝날 일이 네가 직접 하면 15분이 걸리더라도, 네가 하길 바라고, 아빠는 빈 곳을 채우는 역할을 하려고 한다. 이런 관점을 유지하고 싶지만 오늘의 이야기는 그와 다르다. 그래서 교육조의 목소리가 필요하리라 생각했다.


인간이 아는 세상은 전 세계를 통틀어 지구 인구수만큼 있단다. 왜냐하면, 하나의 사건에 대해 개개인이 인식하고 판단하는 방향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세상은 내가 오감으로 느끼는 전부에, 내가 이해하는 전부라고 정의할 수 있다. 너에게 ‘세상이란?’이라고 물을 때, 너의 대답은 너의 오감과 이해를 넘지 않을 것이다. 아빠와의 교집합도 있겠지만, 전체 집합을 보면, 교집합 부분을 제외한 영역이 더 클 것이라고 확신한다. 함께 밥을 먹고, 같은 집에서 자도, 너는 학교에 나는 직장에서 8시간을 지내기 때문이다. 하루 반나절 이상을 서로 다른 환경과, 서로 다른 이들과 지낸다. 그런 환경에서 오는 차이점이 크기 때문이다. 아빠도 학교 생활을 했고, 네가 거쳐온 길을 걸어왔지만, 지금의 사람들은 나의 ‘그때’의 사람들과 다르다. 그러니, 너의 세상과 나의 세상은 다른 것이다. 내가 네 세계로 들어가면, 판타지 애니메이션에서 많이 다루는 이 세계로의 진입인 것이다.


이렇게 다른 세상을 살아왔고, 살고 있는 내가 너에게 하는 이야기란 어쩌면 사회 비판일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서로 다른 세상에 살고 있더라도 교집합은 존재한다. 아빠는 그렇게 믿는다.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고, 사회 속에서 살아가며, 안주할 공간에서 지내기 위해서는 손이 반드시 필요하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먹는다. 어떤 세상에 사는 인간이라도 생명 유지를 위해서는 먹어야 한다. 만일 네게 조리 기술이 없다면, 너는 굶을 것이다. 너는 아니라고 할 것이다. 커다란 마트에 잔뜩 쌓인 것이 먹을거리고, 전자레인지나 에어프라이어만 있으면, 언제든지 뜨끈한 밥과 국, 찌개, 일품요리, 거기에 디저트까지 해결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 그런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네가 전자레인지, 에어프라이어, 오븐, 토스터, 가스레인지, 냄비, 프라이팬을 다룰 수 있음을 아빠는 알고 있다. 조금 지나면 달걀 프라이도 마트에 등장할 것이다. 삶은 달걀은 이미 등장했고, 달걀찜도, 달걀 샐러드도 있다. 어쩌면 균형 있는 식사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네가 밀키트나 완전/반 조리 식품에 든 식재료 외 조미료와 첨가제를 거부할 경우, 너는 대파를 사고, 감자를 사서 깎고, 양파를 썰어야 할 것이다. 맛을 보고, 입맛에 맞을 때까지 조정할 것이다. 그런데, 아직은 그런 기술이 너에게는 부족하다. 네가 도시를 떠나 거주하게 된다면, 그래, 캠핑을 한다면, 너에게는 버너를 다루고, 캠핑용 음식을 차릴 기술이 필요할 것이다.


옷은 어떤가? 언제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안다면, 너는 사회적 관습 속에서도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에게 맞는 스타일을 갖춘다면, 시선을 끌 수 있을 것이다. 돋보이는 것은 사회생활에 필요한 기술이다. 문화 잡지를 보고, 브랜드의 신제품에 눈길을 돌리고, 옷장에 있는 옷을 떠올리고 그에 어울리는 옷을 고르는 기술은 시간이 지나도 계속 알아보고 학습해야 할 부분이다.


집은 휴식을 취하고 안주할 공간이다. 하루종일 밖에서 생활하다가 따뜻한 샤워를 하고 시원한 물을 마시고, 편히 앉아 쉴 수 있는 곳이 집이다. 만일, 전구가 나간다면, 전구를 끼우면 된다. 돌리기만 하면 되니 굳이 기술이랄 것도 없다. 하지만, 새 전구가 없다면? 쓰던 전구를 가지고 마트의 해당 코너로 달려갈 것이다. 암페어가 뭔지, 볼트가 뭔지를 깊이 이해할 필요는 없지만, 이를 알면 알맞은 전구를 고를 수 있다. 두꺼비 집의 휴즈가 나가 정전이 되면? 기술자를 부르고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 기다리는 동안 초를 켜면 되겠지만. 네가 퓨즈를 교체할 수 있다면, 알맞은 퓨즈를 사 와서 전기를 다시 살릴 수 있다면 어떨까? 여름이 지나면 선풍기를 해체해 프로펠러를 닦아 비닐로 싸서 다용도실에 보관한다. 선풍기에서 소리가 나면, 분해해서 안쪽의 나사를 조이고 다시 조립한다. 기술자를 기다릴 필요도 없이.


아직 우리는 손 기술이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아마도 시간이 더 흐르면, 자동 조리 기구가 나올 것이고, 코디를 하는 인공지능과 상의할 것이며, 집의 유지보수는 인공지능이 담당할 것이다. 지금도 조리와 옷 선택, 그리고 집안의 일부는 디지털 기술로 처리한다. 나사를 조이는 데는 나사에 맞는 도구가 필요하다. 일자 드라이버나 십자드라이버. 네가 이 드라이버를 다룰 줄 아는데, 드릴을 갖게 된다면, 더 짧은 시간에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손기술을 알고, 그에 맞는 첨단 도구를 사용하는 것과, 손기술을 모르고 첨단 기술을 활용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손기술을 알면, 더 잘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자동화 도구의 작동 원리도 더 빨리 배울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기술 발전을 따라가며 적응하는 방식이다.


시장이 물물교환의 시대였을 때, 인간은 누구나 손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시장에 화폐가 등장하니, 내가 물건을 만들지 않아도 돈으로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게 됐다. 손기술이 필요 없어졌다. 아니, 지갑에 돈을 채울 손기술만 있으면 됐다. 조리는 돈으로 산 완전 조리 식품으로 대신하고, 옷은 여러 매체와 전문가의 조언이 골라줄 것이며, 집의 유지보수는 기술자가 돈을 받고 할 것이다. 손기술이 필요 없어졌다. 당연히 교육 기관에서는 이를 가르치지 않는다. 덕분에 우리는 돈을 쥐고 기술자를 기다린다.


아래의 지도는 통신망이 닿는 지역을 표시한 지도다. 이 지역에서는 지도 앱으로 편히 여행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외 지역으로 여행을 떠난다면, 충분한 보조 배터리를 가지고 가도 지도 앱은 무용지물이다. 네가 지도와 나침반을 사용할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발전된 상황을 보여주는 매체, 손기술을 가르치지 않는 교육기관, 미래의 편리한 생활을 보여주는 영화와 애니메이션. 우리는 있지도 않은 기술이 곧 올 것을 믿으며 손기술을 잃고 있다. 인간이 두 발로 서서 손을 써 살던 기술을 잃고 있다. 첨단 기술의 점유율이 높아지면, 향수와 추억, 문화적 취미로 아날로그 도구를 사용하고 유지보수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때는 손기술이 희소가치가 있는, 너를 빛나게 해 줄 잠시의 쇼(show)가 될 것이다. 마술가가 카드 마술을 보여주는 것 같이.


https://www.opencellid.org


아빠의 교육조의 목소리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아직 아날로그의 점유율이 높으니 손기술을 배우라는 것은 아니다. 첨단 기술이 생활 전반에 들어올 것은 당연히 올 객관적 미래다. 그 미래에 문화적 추억을 즐기라는 것이 아니다. 첨단 기술을 보다 잘 활용하려면, 더 효율적으로 활용하려면, 손기술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손기술을 알면 너는 자립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지갑을 들고 어두운 거실에 초를 켜고 기술자가 오길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첨단 기술의 세상에서도 지갑을 들고 어두운 방에서 기술자를 기다릴 것이다. 그런 네 모습은 보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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