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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사람 따라 걷기

by 가브리엘의오보에

*Kurt Wu, Pinterest


조용한 나락


출근해서도 멍하니 앉아 있었다.

평소엔 지옥철에서 내리면 힘이 쭉 빠져 책상 앞에 축 늘어지는 게 일상이었는데, 오늘은 그런 상태조차 아니다. 그냥… 멍하다.


오늘도 실적은 비어 있고, 상사의 말은 귀를 뚫고 지나간다.

주변은 북적대고, 웃고, 떠들지만…


나는 나만 쫓기는 기분이다.


조금만 예민한 억양이 들려도 ‘혹시…’ 하는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상상, 내 자리가 위태롭다는 상상.


이 무기력, 이 조급함, 이 소외감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문득,

나를 걱정해 주고, 나를 기다려 줄 한 사람이 간절해진다.




같은 공간 속


그때, 한 사람에게 시선이 멈췄다.

회사에서 가장 조용한 사람.

늘 같은 루틴으로 일하고, 말수도 거의 없다.

활기는 느껴지지 않고, 조용히 키보드를 두드리는 모습이 오늘따라 눈에 띈다.

평소엔 존재감마저 없던 사람인데.


그가 복사기 앞에 섰다.

눈빛이 빛나는 것도 아니고, 어떤 강풍에도 유연할 것 같은 카리스마도 없다.

나 역시 복사할 게 있어 복사기 앞에 섰는데, 자연스럽게 그가 다루던 문서에 시선이 갔다.


다른 부서라 내용을 알 수는 없었지만, 제목만 봐도 일반적인 업무 문서라는 건 느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가 낸 결과물은 그가 주는 이미지와 닮지 않았다.


한 페이지를 빠르게 훑어보니,

이건 생각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관리용 문서였지만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고, 필요한 정보가 보기 좋게 정리돼 있었다.


묘하게 믿음이 가는 사람.

마치, 자신의 속도에 스스로 확신을 가진 사람처럼.


그가 낸 결과는 조용히, 그러나 명확하게 우수했다.




나의 상상


나를 무너뜨리는 건

일의 결과가 아니라,

그 결과를 미리 상상하는 내 생각이라는 걸 깨닫는다.


“이러다 안 되겠지.”

“또 뒤처지겠지.”

“다들 나보다 낫잖아.”


정작 아무도 나를 비난하지 않았는데,

가장 매서운 말들은 전부 내 머릿속에서 나왔다.


사람들의 시선을 오해하고,

언짢은 억양 하나에도 오해를 얹는다.

불필요한 사람이라는 불안감이 근거도 없이 마음을 잠식한다.




흐름


그 조용한 사람에게도 무기력한 날은 있을 것이다.

컨디션의 곡선이 없을 리 없고,

그 역시 흔들릴 테지.


그런데 그는,

흐름에 거스르려 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날 이후, 나는 그를 몰래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눈이 자꾸 간다.

아마도 그가 낸 결과에서 느껴지는 깊이 때문일 것이다.


컨디션이 나빠 보이는 날에도

그는 리듬을 버리지 않았다.

속도가 느려졌을 뿐, 여전히 그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상황이,

혹은 스스로 만든 상상이 그를 흔들 텐데—

그는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해류처럼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힘이 없는 게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힘.


오늘 나는,

그 사람의 조용한 발걸음을 따라 걷기로 했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이라는 막연함이 또 나를 흔든다.


그래도 그냥,

떠오르는 대로 스케치해 본다.




스케치


세상이 빠르게 움직이는 날에도

나의 속도는 조용하다.


세상이 거세게 옥죄어 올 때,

어깨가 좁아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편다.


익숙한 속도를 유지한다.

가만히 생각하고, 조용히 키보드에 옮긴다.



이런 나의 모습은 아직 상상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람을 완전히 흉내 낼 생각도 없다.


하지만 흉내 내다보면, 언젠가는

지금의 나도, 그의 모습도 아닌

‘흔들리지 않는 나’로 조형될 것이다.


그 길은 아주 천천히,

가장 깊은 색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9788963719184.jpg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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