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받고 싶은 마음을 들고, 작품이라는 국경을 드나드는 사람
작품을 여행처럼 다녀온다. 1화에서 입국심사를 하고, 정주행을 끝내면 한숨 한 번으로 현실에 착륙한다. 내가 원하는 건 단순 공감이 아니다. 내 마음을 정확히 읽고, 그에 맞춰 손을 얹어주는 행동. 이것이 내가 작품을 고르고 반복해 보는 이유다.
드라마 〈쓸쓸하고 찬란하神 도깨비〉는 열 번쯤, 애니메이션 〈이세계 유유자적 농가〉는 다섯 번, 만화 〈은수저〉는 네 번, 김용의 〈사조영웅전〉은 여섯 번.
“국민 명작”이란 타이틀을 단 작품들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내 취향은 따로 있다. 남들이 “명작이래!”라고 떠들 때,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내 서랍 속 리스트를 본다. 그리고 거기서 꺼낸 작품을 다시 본다. 또 본다.
때로는 아주 느리게 먹는다. 일본 드라마 〈하츠코이〉. 너무 맛있어서 숟가락을 작은 걸로 바꿔 들었다. 집중할 수 있는 시간에만 한 숟가락씩. 시리즈 절반도 아직 못 봤다. 나한텐 그게 정상이다.
요즘 나는 새 작품을 고르는 데도 절차가 있다. 나중에 볼 생각으로 리스트업을 해두고, 가장 최근에 올려둔 것부터 1화를 튼다.
그리고 묻는다.
“계속 볼래? 아님 여기서 지울래?”
이게 나의 입국심사다.
설득되지 않는 이야기는 1화가 끝나자마자 추방한다. “왜 이야기가 이렇게 흐르지?”라는 의문이 드는 순간, 감정 탑승권은 찢어진다. 감정은 소중하니까, 헛도는 서사에 싣고 싶지 않다.
심리학에선 이런 걸 ‘선택 피로를 줄이는 기본값 전략’이라고 부른다더라. 말이 거창할 것 없다. 피곤할 때는 늘 가던 식당 가는 거다. 실패 확률 낮은 곳. 내 혀가 알고, 내 배가 안심하는 메뉴. 작품도 마찬가지다.
정주행을 끝내면 나는 “하—” 하고 크게 숨을 뱉는다. 그게 끝.
글을 쓰거나 음악을 틀거나, 감성적인 뭔가를 하지 않는다. 그냥 한숨. 그리고 일상으로 복귀. MBTI가 T라서? 글쎄, 그냥 내 방식이다.
그 한숨은 입국 게이트를 지나며 쉬는 숨과 닮았다. 방금 전까지 나는 다른 나라(다른 세계관)에 있었다. 낯선 골목을 걸었고, 그들의 언어로 울고 웃었다. 그러다 다시 내 집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른다. 여행이 끝났다는 건, 여행이 있었다는 뜻이다. 나는 그걸로 충분하다.
가장 강하게 남아 있는 장면을 꼽으라면 이런 것들이다.
• 영화 〈선물〉에서, 시한부 아내를 위해 마지막까지 무대에 서는 남편.
• 〈도깨비〉에서, 은탁이 바닷가에 앉아 죽은 엄마에게 지금의 자신을 보고(報告)하는 장면.
• 그리고 그 밖의, 오열하거나 쓸쓸한 순간들.
장면 공통점? 죽음, 이별, 눈물? 아니다.
핵심은 “정확히 이해하려는 태도”와 “그 이해대로 행동하는 손길”이다.
내 마음을 읽기 위해 시간을 들이고, 그 마음에 맞는 방식으로 만지는 것. 말이 아니라 행동. 위로한다는 말 대신, 무대를 준비하는 사람. 듣는 척이 아니라, 내 리듬에 맞춰 질문을 멈추는 사람. 그런 사람.
작품 속 캐릭터가 나를 대신해 그런 행동을 할 때, 나는 ‘받고 싶은 돌봄’을 잠시 빌려 쓴다. 심리학 책들은 이런 걸 ‘정서적 유효성(Emotional Validation)’이라고 적어두지만, 사실 단어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원하는 건 그 감각이다.
나는 주제(첫사랑, 실존적 갈림길…) 때문이 아니라, 집중력이 이어질 때만 천천히 본다. 집중이 끊기면 멈춘다.
반대로, 막힘 없이 달리고 싶은 날엔 정주행 모드. 감정의 엔진을 한 번에 가동해 순환시키고 싶을 때가 있다. 그때는 감정이라는 연료를 통째로 태운다.
누군가는 “향유(Savoring) 전략”이라고 부른다. 맞다. 좋아하는 걸 오래 즐기기 위해 나누어 먹는 기술. 근데 나는 기술까지도 아니고 그냥 몸이 아는 쪽을 선택한다. 내 감정 기름통을 어떻게 쓸지, 나는 꽤 정확하다.
많은 이들이 묻는다. “그렇게 많이 보면, 작가니까 분석도 하겠네?”
절대 아니다. 나는 흐름에 몸을 밴딩 테이프로 붙여두고 그냥 쓸려간다. 감정선이 오른쪽으로 구부러지면 오른쪽으로, 아래로 꺼지면 같이 내려간다. 분석이 아니라, 동조(Entrainment).
분석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다만 ‘감상’이라는 영역을 ‘일’로 오염시키고 싶지 않다. 감정의 순도를 지키고 싶은 본능. 자연발화형 몰입자. 그러다 보니, 나중에 쓸 수 있는 재료가 손에서 미끄러져 나갈 때도 있다. 그래서 요즘은 ‘분석’ 대신 ‘감정 캡처’를 하자고 내게 제안한다. 단 세 줄이면 된다.
• 보기 전 내 상태: “오늘은 뭔가 텅 비어 있다.”
• 가장 크게 흔들린 순간: “그가 무대 위에서 울음을 삼킬 때.”
• 다음날 남은 잔상: “정확히 이해받는다는 건, 말이 아니라 손을 얹는 일이구나.”
분석 아닌 기록. 재료는 쌓이고, 나는 여전히 감정을 먼저 느낀다.
남들이 다 봤다는 작품보다, 내가 골라 여러 번 본 작품이 더 많다. 남과 다르고 싶어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 감정에 꼭 맞는 작품을 내 손으로 고르고 싶다”**는 욕구다.
내가 내 마음의 매니저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매니저는 모두가 좋다는 식당 예약 대신, 내가 소화 잘하고 좋아하는 메뉴를 안다. 그래서 그걸 또 예약한다.
나는 감정의 여행객이다.
서사의 입국심사를 통과한 세계에만 감정을 싣는다.
정주행이 끝나면 한숨 한 번으로 현실에 착륙한다.
하지만 마음속엔 그들이 내게 건네준, 정확히 만져준 손길을 챙겨 온다.
퍼즐 조각 하나가 더 맞춰졌다.
다음 조각은 어디 있을까?
아마 또 어떤 작품 속, 내 마음을 정확히 읽어주는 한 장면에서.
그때도 나는 느리게 혹은 한 번에, 또 한숨 쉬며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적겠지.
“이번 여행에서 가장 오래 남는 감정은 _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