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라는 계절 위에 내리는 기분 좋은 소란

by 가브리엘의오보에

"아빠, 나 이번 티켓팅 또 실패하면 진짜 인생 망하는 거야.”


모니터 앞에 바짝 붙어 앉아 마우스를 움켜쥔 네 뒷모습을 보며 나는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어. 0.1초의 찰나에 희비가 갈리는 그 치열한 세계. 누군가는 "고작 연예인 하나 때문에 그러느냐"고 하겠지만, 아빠는 네 눈 속에서 타오르는 그 뜨거운 진심을 알아. 그건 단순히 팬심이라는 단어로 담아내기엔 부족한, 아주 순수하고 열렬한 ‘에너지'니까.


요즘 세상을 보면 무언가를 이토록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참 많더구나.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을 위해 오픈런을 하고, 스포츠 팀의 승패에 제 일처럼 울고 웃으며, 심지어는 보이지 않는 캐릭터나 특정 취향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시간과 비용을 쏟아붓지.


사실 이건 비단 너희 세대만의 이야기는 아니야. 70년대에 비틀즈에 열광하던 소녀들이 그랬고, IMF 시절 박세리의 맨발 샷에 온 국민이 가슴을 쓸어내리던 그때도 그랬지. 무언가를 열렬히 지지한다는 건, 메마른 일상에 단비 같은 원동력이 되어주거든. 그 대상이 빛날 때 내 삶의 채도도 함께 높아지는 기분, 아빠도 잘 안단다.


내 마음의 빈방,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하지만 아빠는 가끔 네가 너무 치열하게 '좋아함'을 이어가는 모습을 볼 때면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해.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마음은 사실 굉장히 소모적이거든.


사랑에도 밀도가 있다면, 네 마음은 지금 1g의 틈도 없이 꽉 찬 상태일 거야. 잡념이 들어올 여백도 없이, 네 마음속 가장 귀한 상석(上席)을 그 '최애'에게 기꺼이 내어준 셈이지. 온종일 그 사람의 스케줄을 확인하고, 관련 뉴스를 훑고, 혹여나 누가 내 아티스트를 험담이라도 하면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그 상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지 않니? '내 마음의 주인은 나인데, 왜 그 자리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앉아 있을까.’


우리는 무언가를 너무 깊이 사랑하다 보면, 종종 나 자신을 소외시키곤 해. 그 사람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라 믿으며 살아가지만, 정작 내 몸이 보내는 피로 신호나 내가 진짜로 먹고 싶었던 저녁 메뉴, 내 미래에 대한 고민은 '최애'라는 거대한 존재 뒤로 숨어버리지.



내가 존재해야 나의 '사랑'도 숨을 쉰다


아빠가 오늘 너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은 아주 단순해.


"네가 존재해야 네가 좋아하는 그 마음도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


비유를 해보자면, 네가 좋아하는 그 대상이 밤하늘을 수놓는 화려한 불꽃이라면, 네 마음은 그 불꽃이 터질 수 있는 '밤하늘' 그 자체야. 하늘이 사라지면 아무리 아름다운 불꽃도 보일 곳이 없단다. 네가 너를 잃어버리고, 네 일상이 무너지고, 네 마음의 중심이 타인에게만 쏠려 있다면, 네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그 '사랑'조차 결국은 갈 곳을 잃고 흩어지게 돼.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랑은 나를 갉아먹으며 하는 사랑이야. 그건 열정이 아니라 연소(燃燒)에 가깝지. 네가 그 아티스트를 보고 웃을 수 있는 건 네가 건강한 눈을 가졌기 때문이고, 그 노래에 감동할 수 있는 건 네 안에 풍부한 감수성이 살아있기 때문이야. 결국 모든 아름다움의 시작점은 '최애'가 아니라 바로 '너'인 셈이지.


너라는 계절을 응원하며


아빠는 네가 무언가를 그토록 뜨겁게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라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 무채색 세상에서 누군가를 위해 기도를 올리고, 응원을 보내는 그 마음은 너를 더 따뜻한 어른으로 성장시킬 거야. 그 '최애'와 함께하는 시간들이 네 청춘의 가장 찬란한 페이지가 되길 아빠도 곁에서 응원할게.


다만, 티켓팅에 성공해 환호하는 순간에도, 혹은 아쉬움에 발을 구르는 순간에도 가끔은 손을 가슴에 얹고 스스로에게 물어봐 줬으면 좋겠어. "오늘 나는 나를 위해 얼마나 웃었나? 내 마음의 방에 나를 위한 의자 하나는 잘 놓여 있나?" 하고 말이야.


네가 지지하는 그 사람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소중한 건 바로 지금 숨 쉬고 고민하는 너 자신이라는 걸 잊지 마렴. 네 마음 한복판에는 언제나 '너'라는 주인이 든든하게 자리 잡고 있기를, 그리고 그 안정감 위에서 네 사랑이 더 건강하게 꽃피우기를 바란다.


오늘 밤엔 휴대폰 잠시 내려놓고, 아빠랑 따뜻한 코코아 한 잔 어때? 네가 좋아하는 그 사람 이야기도 좋지만, 아빠는 오늘 네가 학교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네 마음은 오늘 어떤 날씨였는지 그게 더 궁금하구나.


너의 그 열렬한 '좋아함'을 온 마음 다해 응원한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너 자신을 가장 먼저 사랑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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