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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브리엘의오보에 May 20. 2018

문방구

과도기는 지났지만 익숙함을 놓지 못하는 나이

Photo by Jay Wen on Unsplash


문방사우는 종이(紙), 붓(筆), 먹(墨), 벼루(硯)를 이르는 말이다. 이를 문방구 용어로 번역하면, 수첩과 펜이다. 수첩은 종이로 만든 기록장의 대명사이고, 펜은 연필, 샤프, 볼펜, 만년필 등 필기구의 대명사이다. 어린 시절 나의 문방사우는 공책과 연필이었다. 연필은 샤프로, 볼펜으로, 만년필로 전환됐다. 공책은 스프링 노트로, 대학 노트로 전환 했으며, 플래너 혹은 다이어리로 전환 했다. 연필과 샤프의 베스트 프렌드는 지우개다. 볼펜과 만년필의 베스트 프렌드는 수정액이다. 공식적인 노트나 문서의 경우에 그렇고, 개인용 노트, 수첩, 플래너, 혹은 다이어리의 경우, 볼펜으로 찍찍 그은 ‘취소’ 표시가 베스트 프렌드다. 


대형 서점에 가서 책을 본 후 마무리는 언제나 문구 코너였다. 연말 혹은 연초에는 플래너와 다이어리를 구경한다. 평소에는 수첩이나 노트를 구경한다. 그러다가 인류 최고의 발명품인 포스트-잇을 구경한다. 필통도 때때로 구경의 대상이다. 처음엔 도시락처럼 뚜껑과 본체가 있는 필통을 사용했다가,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뚜껑이 열리는 자동 필통을 사용했다. 그 다음은 지퍼가 달린 야들야들한 필통이었다. 지퍼 필통은 회사를 다닐 때까지 모델만 변경되며 유지됐다. 필통 안에는 펜과 지우개 외에도 얇은 커터도 들어 있었다. 밀어서 종이들을 고정하는 클립도 있었다. 만년필을 사용할 때는 잉크 카트리지가 들어 있었다. 필기구가 변화했다 했지만, 필통 안을 보면 연필도, 샤프도, 볼펜도, 0.5 미리 펜도, 만년필도 들어 있었다. 다가구 주택이나 아파트 같이 온갖 필기구와 주변 물품들이 들어 있었다. 그 날 기분에 따라, 혹은 메모할 때인지 기록할 때인지에 따라 사용하는 필기구가 달랐기 때문이다.


286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문방구에서의 구경 물품에 플로피 디스크가 포함됐다. 광학매체가 상용화 되면서 CD-ROM이 그리고 DVD-ROM이 포함됐다. CD와 DVD를 사용하면서 이들을 넣어 휴대할 파우치가 포함됐다. 그러다가 외장 하드 디스크가 상용화 되면서 이들은 집 책상 서랍 혹은 책꽂이에 보관용 매체로 놓여있었다. 외장 하드 디스크는 크기가 작아지는 대신 용량이 커졌고 덕분에 가방 내 점유 공간은 줄어들고 가방 전체 무게도 줄었다. 간혹 고용량 신제품이 나오면 추가로 구매하기도 했다. 키보드는 컴퓨터 구매 시 함께 우송된 키보드를 사용했다. 인체 공학적 키보드가 나왔을 때 기존 것이 멀쩡한데도 키보드는 바뀌었다. 또 무선 키보드와 마우스가 나왔을 때 이것들로 책상에 놓이는 키보드와 마우스가 바뀌었다. 마음에 드는 마우스 패드가 없어서 10분 이상을 마우스 패드 코너에 서 있던 적도 있다. 인터넷 쇼핑이 활성화 되고 가장 싼 온라인 상점을 알게 되면서 사용하던 주변 기기가 변경됐다. 데스크 탑이 노트북으로 전환되는 시기에는 마우스가 변경됐다. 휴대하기 좋은 작은 것으로 혹은 무선 마우스 또는 블루투스 마우스가 컴퓨터 가방에 들어 있었다. 마우스 케이블을 굳이 케이블 테이프로 감지 않아도 됐다. 대신 충전지나 배터리를 여분으로 가지고 다녔다. 


클라우드 서비스가 상용화 되고 5GB 정도는 무료로 제공할 때 가방에서 외장 하드가 사라졌다. 사실 한동안은 외장 하드 디스크는 계속 가지고 다녔지만, 집에 있는 컴퓨터를 끄지 않고 회사에서 인터넷을 통해 원격으로 자료를 다운로드 받거나 업로드 할 수 있게 되면서 외장 하드는 집 책상 서랍 혹은 책꽂이에 보관용으로 진열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방에는 노트북과 무선 마우스, 마우스 패드가 들어 있었고, 회의 내용을 메모하는 수첩과 필기구 혹은 플래너/다이어리와 필기구는 들어 있었다.


휴대폰이 스마트 폰으로 변경되고, 앱 스토어가 활성화 됐지만, 메모용 앱과 수첩 및 필기구는 공존했다. 모바일 기기의 좁은 키보드를 빠르게 치지 못해서도 그랬지만, 아이디어를 구상할 때 수첩에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각종 도형으로 마인드맵이나 이슈 트리(issue tree)를 그리기에는 수첩이 편했기 때문이다. 회의에 노트북을 지참하기 시작하면서 10년 이상 축적한 타이핑 실력이 수첩 휴대를 방해했다. 물론 노트북 옆에는 수첩과 필기구가 있었다. 용도는 부장님의 질문에 빠르게 아이디어로 대응하기 위해 생각을 정리할 때 마인드맵을 그리기 위해서 였다.


스마트 폰 시대에 나는 스마트 폰 용량 부족으로 애를 먹었다. 고기능 앱을 찾으면 설치하고 사용하고 다시 다른 고기능 앱으로 변경 설치하고 사용하는 일이 반복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형 서점에 가면 수첩과 필기구와 필통을 구경하고, 연말 18개의 스탬프를 받아 커피 전문점 다이어리를 확보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내 가방은 항상 무거웠다. 디지털 장치와 수기용 필기구가 항상 가방 안을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무리 많은 앱을 설치하더라도 스마트 폰 중량은 늘어나지 않았다. 주말이면 간혹 가방을 정리한다. 스마트 폰도 정리한다. 3개월 이상 사용하지 않은 것은 모두 버리거나 책상 혹은 책꽂이로 향했다. 일상에서 걷는 내 어깨는 항상 무거운 가방이 짓눌렸다. 정신적인 쳇바퀴로 스트레스와 우울함이 쌓이는데 가방마저 무거 우니 하루하루가 우울했다.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미니멀리즘의 유행.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만 소유하고 나머지는 처분한다. 인생을 가볍게 살라는 메시지에 귀가 솔깃했다. 그래서 토요일과 일요일 양일을 잡아 작심하고 정리에 들어갔다.


스마트 폰의 정리. 스마트 폰을 샀을 때 설치되어 있는 앱과 같은 용도의 앱은 모두 삭제했다. 아니 폰을 아예 초기화해 버렸다. 내가 사용하는 앱들 중에는 다행히도 웹브라우저를 통해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가 많았기 때문에 정말 앱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브라우저로 대체했다. 일정은 캘린더 앱을 사용한다. 메모는 메모장 앱을 쓴다. 할 일은 미리 알림(애플빠로서 아이폰을 사용한다)을 사용한다. 앱으로 설치해서 사용하는 것은 블로그 통계를 볼 수 있는 블로그 앱, 팝케스트를 들을 수 있는 포털의 앱도 설치해 사용한다(물론 디폴트 앱의 팝케스트도 함께 듣는다. 이는 팝케스트가 앱(혹은 플랫폼)별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TED 앱과 음원 서비스 앱(뮤직 PD 활동으로 구성 앨범이 게시되면 무료 1개월 사용권을 제공하므로 디폴트 음악 앱을 사용하지 않는다)도 있다. SNS 앱은 각종 공유를 위해 트위터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을 설치했다. 메일 계정은 디폴트 메일 프로그램에 모두 등록했다. 그리고 eBook Reader. 대여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어서 전용 앱을 설치해서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정리하니 사진 저장 공간도 늘어났다. 


수기용 필기구와 수첩 대신 앱을 사용하면서 알게 된 장점은, 기록한 내용을 검색할 수 있고, 악필로 나중에 못 알아볼 염려가 없으며, 스마트 폰 하나만 가지고 다니면 된다는 점이다. 물론 빠른 타이핑 역량 개발은 필수였다. 중간에 블루투스 키보드를 가지고 다닌 적도 있지만, 메신저 대화가 많아지지 않으면 사용하지 않게 되어 집에 놓아두고 다닌다. 이렇게 되니 가방에는 노트북과 블루투스 마우스, 마우스 패드, 스마트 폰 그리고 보조 배터리와 에그(KT의 휴대용 인터넷 핫스팟)만 남았다. 가방은 군살이 빠진 듯 fitness 됐다. 더불어 대형 서점에 가서도 문구 코너를 가지 않게 됐다.


디지털 시대가 되니 문방사우는 이우(二友)가 됐다. 휴대용 작업 공간인 노트북과 휴대용 기록 매체인 스마트 폰이 전부이다. 광학 매체도 사용하지 않게 됐고 클라우드에 올려 두고 참조한다. 출퇴근길에 보던 책도 eBook으로 바뀌어 가방은 더 가벼워졌다. 간혹 신간을 보고 싶을 때 eBook으로 출간되지 않았을 경우 종이 책을 가지고 다니는 경우가 있지만 일상적이지 않다. eBook의 장점은, 밤에 스탠드 없이 볼 수 있고, 형광펜이 없어도 문구에 표시를 남길 수 있고, 타이핑을 하지 않고 클릭으로 SNS에 공유할 수 있다. 음악은 스트리밍 서비스가 있어 굳이 다운로드 받지 않아도 되고, 차량에 블루투스 기능과 연결되어 차량 라디오를 틀지 않고 내 compilation list를 듣는다. 아이와 ‘누가 음악을 틀 것인지’를 놓고 다툼을 벌이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 아이가 가족 동반 시 음악 담당이 됐다. 보이 그룹의 음악으로 한정되는 경향이 있지만 듣지 않는 음악이 아니니 그냥 들으면 문제는 없다.


간혹 스마트 패드로 노트북을 대신하면 가방이 더 가벼워지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지만, 작업을 위해서는 블루투스 키보드가 필수여서 또 손가락으로 터치하는 것보다는 아직 마우스가 편하고, 마우스를 들고 다니지 않고 집이나 사무실의 마우스를 꽂아 쓰니 휴대 하지 않아서 좋다. 문구 코너의 디지털 코너도 거의 가지 않는다. 음악은 스마트 폰을 살 때 함께 주는 이어폰이면 된다. 그러니 신상품을 구경하러 가지 않아도 된다. iPhone 7으로 전환했을 때 구 이어폰을 그대로 사용하고 싶어 잭을 사용했다. 이 잭을 잃어버리고 잭을 사러 애플 전문점에 갔다가 그냥 나왔다. 신규 번들 이어폰을 쓰면 되기 때문에. 여행 갈 때도 보조 배터리만 챙기면 디지털 카메라나 DSLR을 가지고 가지 않아도 된다. 인화하지 않으니 사진관에도 가지 않아도 된다. 인쇄하는 일도 적으니 프린터도 처분했다. 덕분에 프린터 카트리지와 A4 용지 구매도 하지 않는다. 스마트 폰에 포스트-잇을 붙일 필요 없으니 포스트-잇도 구매하지 않는다. 대신 책상 서랍과 책꽂이에는 사용하지 않을 때 넣어둔 각종 충전 케이블이 가득하다. 노트북 케이블, 스마트 폰 충전 케이블, 모니터 연결 케이블, 랜 선이 서랍을 채운다. 책상에서 지우개 똥을 치우는 일도 없다. 전자 연필깎이가 더 편리할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스탠드는 LED가 전기세가 적다는 생각도 거의 하지 않는다. 아직은 시립, 구립 도서관에서의 대여 혹은 신간 서적 구매(2번 이상 읽을 책만 구입)를 하기 때문에 대형 서점 계산대에 마련된 무료 책갈피는 몇 개씩 챙긴다. 읽고 나서 책갈피에 저자명, 책 제목, 다 읽은 날짜를 기록하니 새 것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도 읽은 책의 바코드를 읽어 기록하고 평점도 매길 수 있는 앱으로 변경되고 있다. 아직 과도기다. 그래서 책갈피는 아직 새 것을 가져온다.


8살 이후 대형 마트 드나들 듯 왕래하던 문구 코너가 이제는 가지 않는 코너가 되어 버렸다. 신상품의 디자인에 감탄할 필요도 없어졌다. 신간을 먼저 읽어보고 대여하거나 구매하는 경우가 아니면 서점도 가지 않는다. 디지털 앱으로 변경하니, “연필을 다 써서 문방구 가야 돼‘라든가 ’A4 용지가 없어”, ‘샤프심이 다 떨어졌어’, ‘커터 날이 다 떨어졌어’ 와 같이 ‘다 떨어질 날’이 사라졌다. 다만 연말 연초에 새 플래너에 신년 계획을 세우기 위해 디자인을 고르는 일이 사라졌다. 아직 플래너 앱 혹은 디폴트 캘린더 앱의 스킨을 변경하는 서비스는 제공되지 않고 있다. 새 술을 새 포대에 담는 일은 할 수 없게 됐다.


이런 변화는 새로울 것이 없다. 나는 디지털 태생에서 과도기를 지나 완숙기를 살고 있는 세대기 때문이다. 흰색 다이얼식 전화기를 사용했다. 그것이 전자식 버튼 전화기로 변했고, 호출기(삐삐)를 겸용하다가 휴대폰을 사용했다. 한 때 ‘우리 집’하면 자동으로 전화가 걸려 요즘 ‘시리(Siri)’ 부르듯 ‘우리 집’을 외치던 기억이 신선하다. 286 PC부터 종이짝 같은 노트북까지, 거기에 스마트 패드도 사용한다. TV보다 방송 앱을 통해 영화 VOD 앱을 통해 시청을 하니 TV도 거의 켜지 않는다. 20세기 말 인터넷 상용화 시작 시 직접 인터넷 매체(웹 사이트, 모바일 사이트, 모바일 앱) 제작 기획을 했다. 금융, 유통, 소비재, 수입품 등 다양한 업종의 디지털 서비스를 기획하고 프로젝트를 관리했다. 그 전에는 PC 통신 천리안의 고정 고객이기도 했다. 대화방에서 채팅으로 옮겼다. 이젠 요리책도 사지 않는다. 도서관에서 대여하거나 검색해서 레시피를 참조한다. 그렇게 디지털이 없던 시대에서 디지털이 생활 속으로 들어온 지금까지의 변화 과정을 모두 보고 겪었다. 마트에 가기보다 인터넷으로 주문할 때도 많다. 아직 만년필로 종이에 쓰는 필기감이 그립고, 독서등을 사용해 밤을 밝히며 종이 책을 넘기는 감각이 그립다. 과도기는 지났지만 익숙하여 버려지지 않는 ‘문방구’의 감각이 아직 남아 있다. 


물을 섭씨 95도로 끓이기 위해 주의를 기울이고, 주전자에서 드리퍼로 떨어지는 물줄기의 두께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물이 내려가면 다시 물을 붓기 위해 기다리는 일이 귀찮아졌다. 커피 캡슐을 넣고 롱고에 맞춰 커피를 내려 마시면 언제나 동일한 맛을 즐길 수 있어 간편해진 커피 생활에 즐거움을 느낀다. 그래도 가끔은 드립 커피를 내려 토스트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한다. 추억이 되어 버려야 할 시기에 아직 생활 기구로 남아 있는 커피 드립 세트. 티백보다 차 잎으로 차를 우려 마시는 것이 그리운 나이. 그래도 문방구는 가지 않게 됐다. 이제 남은 것은 원두 코너와 종이 필터 코너 방문이 내 일상에서 사라질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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