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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브리엘의오보에 Jan 02. 2020

멋진 프러포즈, 자격은 되고?


로맨스, 낭만. 마치 젊음의 특권인 듯 이야기 된다. 인생의 말년을 보내는 사람들의 것은 희소한 것으로 보기까지 한다. 이는 스스로 차별주의자가 아니라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차별의식이다. 필자는 아직도, 사전을 여러 번 보았지만, 로맨스라는 것, 로맨틱하다는 것, 낭만적이라는 상황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프러포즈를, 가능한 멋진 프러포즈를 받고 싶어 한다. 마치 장을 보러 갔다가 길가 장난감 가게에 전시된, 마음에 쏙 드는 장난감을 갖고 싶은 마음처럼. 주머니에는 그 장난감을 내 것으로 만들 돈이 없는데.


대부분 프러포즈는 남성이 여성에게 받치는 의식이다. 앞으로 가사 활동을 열심히 할 기회를 제공 하겠으니, 지금은 무릎을 굽히겠다는, 일종의 계약이다. 그렇지 않나, 남성들? 프러포즈에 들인 공만큼, 결혼 후 일상에서 상대에게 정성을 기울이고 있나? 마치 당연한 듯이 TV 보다가 밥상 앞에 앉지 않나? 이런 태도는 자신을 낳고 기른 어머니에게도 스스럼없이 행한 행위이기도 하다. 그러니 '앞으로 가사 활동을...'이라든지 '일종의 계약'이라는 말을 한 것이다. 성 역할이라고, 지적인 단어들을 들어가며, 혹시 같이 하게 되는 것은 '돕는다'고 생각하고 있나? 왜 프러포즈를 한 것인가?


그럼 프러포즈를 받을 자격에 대해 논해 보기로 하자. 물론 어떻게 하면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남성이 프러포즈 받는 경우도 많으니)이 될 수 있을지. 그렇다고 그 방법론을 이야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자격'이라는 단어가 부적합할 수 있다. 왜냐하면 프러포즈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내 의사를 표하는데 그것을 들을 자격이 있는지 따지는 것이 시간 낭비라 생각이 된다. 그러나, 이 글에서 논하고자 하는 표현, 프러포즈는, 반지, 장미, 멋진 장소 (거기에 서프라이즈)까지, 소위 '드라마틱한 프러포즈'를 해달라고 말은 못해도 음으로 양으로 티를 낸, 그 프러포즈를 일컫는다.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한 적도 없으면서 돈으로 장식된 프러포즈를 바라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쓴 글이다.


21세기는, 예능에서 사회적 매너를 배우는, 가정의 역할 하나, 학교의 역할 하나가 사라진 시대이다. 따라서, 영화에서, 드라마에서, 혹은 음악 가사에서 나오는 '멋진 프러포즈'는 누군가의 바람이 될 수 있다. 바람을 갖는 것이 잘못일 수 없다. 언급할 가치도 없는 당연함이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사례는, 어쩌면 전체론적으로 봐서 극히 일부인(대부분의 대중매체가 일반화적 언급에 공격받지 않기 위해 사용하는 범위 지정법) 사례이다.


감정의 교환에서, 왕래하는 크기 혹은 규모는 상대적 속성을 지닌다. 세상에 악인은 없다. 내가 좋아하고 친분을 나누는 사람은 모두 착한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세상에 악한 사람은 없다. 따라서 자신의 좋아하는 감정만큼 그것을 표현한다. 악인이 아닌 이의 표현이니 거짓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나? 그렇다면 이 글에서 지적한 프러포즈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인간에게는 오감 외에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확히 감지하는 역량이 있다. 따라서 진심 어린 애정은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느낄 수 있다. 당신은 상대에게, 당신이 '좋아한다는' 사람에게 진심을 다하고 있나?


이제 진심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진심이라는 단어는 꽤 많은 곳에서 언급되는 단어 표현이다. 하나 못해 음악 오디션에서도 '진심을 담아 노래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실 그 음악의 진심이란 작곡자, 작사가의 진심이지 가수의 진심은 아니지 않나? 그러나 우리는 진심 감지 센서를 가진 인간이다. 작곡자 작사자의 진심을 느끼고 그것에 감동을 받은 가수는 그 진심을 잘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진심을 잘 전하라'는 말은 할 수 있는 표현이다.


진심, 정성이라는 말은 애인뿐만 아니라 친구 사이에서도 통용된다. 사랑이라는 것은 상대를 귀하게 여기고 상대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단방향의 애정이다. 이 단방향의 사랑이 만나니 연애라고 하는 것이다. 매일 만나 이야기하고 영화 보고 레스토랑에서 다이닝을 즐기며 여행도 같이 다니지만 즐겁긴 해도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 적다면, 아마도 카페에서 커피 두 잔을 사이에 두고 '나와 결혼해줘'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사무적인 혹은 의무 방어적인 표현으로 들릴 수 있다. 친구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친구란 마음을 나누는 상대이다. 친구를 위해 마음을 다해 행동하지 않는다면 상대는 '얼굴을 알고 있고 자주 만나는 사람'일 뿐이다.


진심을 다하는 행동은 희생이 아니다. 정성을 다하는 행위이다. 그것을 희생이라 생각하는 순간 나는 단지 길거리에서 마주친, 갖고 싶은 장난감을 옆에 두는 행위를 한 것일 뿐이다.


상대를 통해 만나기 전보다 행복해지고 마음이 따스해진다면, 돈으로 채운 멋진 프러포즈가 아니라 '결혼해 달라'는 말 한 마디도 멋진 프러포즈가 된다. 상대의 진심은 충분히 느끼고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전하는 '결혼하자'는 말은 진심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상대의 정성을 받은 사람은 망설이지 않고 남은 생을 상대와 함께 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니 멋진 프러포즈를 굳이 인위적으로 꾸미지 않아도 이런 사람이 표현한 프러포즈는 멋지다.


학년 초, 입학 초기 좋은 성적을 가졌지만 날이 갈수록 하향 곡선을 그리는 학생이나, 최고점을 찍은 적이 있지만 등락이 심한 학생보다, 낮은 성적으로 입학, 학년 초를 맞이했지만 꾸준히 성장하는 학생이 더 믿음이 간다. 비록 시작은 작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나로 인해 상대가 행복을 점점 더 크게 느끼게 된다면 정말 행복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보답이 아니라, 이런 정성으로 촉발된 프러포즈는 멋질 수밖에 없다. 그런 프러포즈를 받을 수 있다. 받을 자격이 생긴다.


필자는 여러 번 글을 통해 '사랑'에 대해 정의하고 언급하고 그렇지 못한 사례를 비판해 왔다. 필자가 비판하는 상황을 겪지 못한 사람은 공감할 수 없을 것이다. 공감할 필요가 없다. 제대로 된 사람을 보고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필자가 살아온 세계는 '사랑'이 희소한 세계였다. 지금도 간혹 보기도 한다. 안타까움에 반복해서 동일한 메시지의 글을 쓰고 있다. 모두 제대로 된 사랑을 주고받으며 각박한 삶에서 오아시스의 휴식을 갖길 바란다. 누군가의 정성어린, 진심의 사랑은 오아시스일 수 있다.


자유주의 세계는, 개인이 자유롭게 모든 것을 결정하는 세계.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하루하루 벌어야 하는 세계. 남의 주머니의 돈을 정당하게 얻기 위해서는 숨 쉴 틈 없이 일해야 하는 세계. 모두가 함께 벌어 쌓아둔 식량을 모두 나누어 먹는 세계가 아닌 것이다. 노력은 각박함을 등에 지고 다닌다. 그런 각박함을 굳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하고, 나를 사랑한다는 사람에게 받는다는 것은 너무 슬프지 않나?


사랑한다면 상대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라. 방법을 모르겠다면 나 자신을 스스로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돌아보라. 나는 내 자신을 행복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나? 자신의 아름다운 행복을 위한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고 있나? 어떤 일이든 경험이 없으면 실수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박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타인을 담을 수 없는 그릇을 가진 사람은 결혼도, 더욱이 자녀도 두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족을 담을 수 없어 가족을 행복하지 않게 하는 존재가 누구도 아닌 자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도, 우정도, 결혼도 함부로 할 것이 못 된다. 타인을 위해 정성을 다할 그릇을 먼저 가져야 할 것이다. 그 그릇을 키워야 할 것이다. 이러니 사랑의 기준도 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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